1893년 새해 벽두.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의 나이트 카페 ‘오베르주 뒤 클루’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의 열정을 좇는 불나방들로 북적거렸다. 하루종일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있던 보헤미안 예술가들은 인간미 넘치는 이 싸구려 술집에 들러 하루 동안 쌓인 체증을 내려놓았다. 벽난로의 열기로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었던 이 술집은 화가들이 자신의 야심찬 그림을 벽에 박힌 못에다 걸어 놓을 수도 있었고 맘에 드는 연인이라도 만나면 하룻밤 묵으며 열정을 불태울 수도 있는 일종의 로맨틱 아지트였다. 오베르주 뒤 클루(즉 ‘못이 있는 여인숙’)라는 이름이 붙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여성화가 쉬잔 발라동(1865~1938)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날 저녁 이 술집을 찾았다.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이 몽마르트르의 뮤즈는 원래 서커스단의 곡예사였지만 15세 때 그네에서 떨어지는 불상사를 겪은 뒤 화가의 누드모델로 방향을 틀었다. 독특한 매력을 지닌 마스크에다 볼륨감 넘치는 몸매로 인해 그는 순식간에 화가들의 여신으로 떠올랐다. 예술가 중 그를 모르면 간첩으로 내몰릴 정도였다.

또 그와 사랑 한번 나눠보지 않은 자는 삼류 예술가나 마찬가지였다. 르누아르, 드가, 툴루즈 로트레크, 퓌비 드 샤반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이 앞다퉈 그를 모델로 삼았고 르누아르와 퓌비 드 샤반은 이 여인을 두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가 모델로 선 것은 일차적으로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론 마음속 깊이 간직한 화가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델을 서는 동안 화가들의 테크닉을 유심히 관찰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그의 작품을 본 로트레크는 놀라움을 표하며 화가가 될 것을 권유했고 드가도 칭찬과 함께 그의 작품을 3점이나 사들였다. 자신감을 얻은 발라동은 이제 ‘옷 벗는’ 일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설 채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성공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를 찾고 있었다. 이곳에 들른 것은 그런 상대로 점찍은 한 주식 중매인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곳에서 피아노를 치는 한 잘생긴 피아니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피아니스트 역시 발라동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연주를 마친 그는 수줍은 기색을 보이며 발라동에게 말을 걸어왔다. 캬바레 ‘르 샤 누아르(검은 고양이)’의 피아니스트 에릭 사티(1866~1925)였다. 정식 뮤지션은 아니고 만일을 대비한 ‘오분 대기조’였다. 이날도 잠깐 누군가의 대타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는 한눈에 반한 기색이었다. 발라동도 내심 이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야수적 본능으로 가득한 몽마르트르의 화가들과 달리 이 젊은 음악가에게는 무언가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모처럼 방어의 벽을 쌓지 않아도 됐다. 불과 며칠 만에 발라동은 자연스럽게 뮤지션과 한 쌍의 불나방이 됐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순진한 친구가 결혼을 제의한 것이다.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삶에 젖어온 발라동은 이 모범생이 결혼 상대로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손사래를 쳤다. 그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발라동은 느슨한 동거를 원했다. 그는 거처를 사티의 집 근처로 옮겼다. 사티도 전략적 후퇴를 택했다. 둘은 서로의 거처를 오가며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발라동으로선 화가가 되기 위해 좀 더 영악해질 필요가 있었다. 불같은 열정이 지나자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젊은 뮤지션은 그의 미래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발라동은 만날 때부터 이 순수한 청년의 얼굴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작품이 완성된 얼마 후 그는 이 작품을 사티에게 선물하고 곧바로 아듀를 선언한다. 만난 지 겨우 6개월 만이었다. 충격에 휩싸인 사티는 “머리를 공허감으로, 가슴을 슬픔으로 채우는 얼음장 같은 외로움만 남았네”라며 망연자실했다. 이후 사티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기 위해 작곡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그때의 짧은 사랑이 영감을 줬던 걸까. 오늘날 사티는 프랑스 현대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된다.

한편 발라동은 음악가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생애 최고의 걸작 초상화를 만들며 자신의 개성적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사티와 헤어진 후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예전에 만났던 주식 중개인과 결혼, 어머니와 자신이 낳은 사생아 모리스 위트릴로(그 역시 훗날 화가로 이름을 날린다)를 부양하며 전업 화가의 길로 나아간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결혼은 공허했다. 그는 결국 남편과 13년 만에 헤어지고 21살 연하의 화가 앙드레 위터와 재혼한다. 그러나 이 아들 같은 남자와의 결혼 역시 씁쓸한 뒷맛만을 남긴 채 파국을 맞았다.

사티와 헤어진 후 몽마르트르의 뮤즈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갈구하던 사랑을 찾지 못했다. 그 헛헛한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예술이었다. 그는 캔버스에 자신이 떠돌았던 현실의 모습을 담담히 담았다. 그의 말대로 “예술은 우리가 증오하는 이승에서의 삶을 영원히 고정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