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에게 길을 묻다] "성장ㆍ균등과세가 國富의 토대"…정약용은 '조선 르네상스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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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250주년 특별 기획 - (1) 다산의 경제사상
한 때는 과격한 토지개혁론자
30가구 단위로 묶어 토지 공동소유·생산 주장
유배 후 증산·통상 중시
임금이 할 일은 생산 늘리는 것…도로·수로 많이 뚫어야 풍요
중상과 중공정책
농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공업·광업·무역도 키워야
한 때는 과격한 토지개혁론자
30가구 단위로 묶어 토지 공동소유·생산 주장
유배 후 증산·통상 중시
임금이 할 일은 생산 늘리는 것…도로·수로 많이 뚫어야 풍요
중상과 중공정책
농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공업·광업·무역도 키워야
올해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탄생 250주년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다산을 보는 시선이 각별하다. 다산의 음력 생일인 16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유네스코 연관 기념일’이다. 다산은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인’이었다.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실학사상을 집대성하며, 정치 경제 과학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실학자로서 꿈꿨던 ‘부국강병’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산을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짚어보는 시리즈를 5회에 걸쳐 싣는다.
다산의 경제사상은 유배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 그동안 이 점을 분명히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산 사상에 대한 이해에 적지 않은 혼란이 빚어졌다. 유배 이전 30대의 젊은 다산은 성리학의 전통적 경제사상에 충실했다. 벼슬살이에 바쁜 나머지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전도양양한 엘리트 관료로서 백성의 살림살이가 실제로 어떤지 관찰하고 경험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유배 이후 18년간 그의 정치·경제 사상은 많이 달라졌다. 역설적이게도 장기간의 유배생활은 다산에게 독자적인 경학(經學)을 개척할 행운을 안겨 주었다. 무지렁이 백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생생하게 보고, 그에 아파하고 또 분노했다. 그 변화는 크게 보아 중세를 넘어 근대를 향하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다산은 정치의 기본 임무는 백성을 골고루 잘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가. 임금은 백성의 부모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여러 아들이 있는데, 어느 아들은 잘살고 어느 아들은 못산다면 부모가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부모된 도리로써 마땅히 잘사는 아들의 살림을 들어 못사는 아들의 살림에 보태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의 이 같은 균등 이념은 토지제도와 관련해 균전(均田)의 주장으로 나타났다. 토지를 인구 수대로 골고루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균전 주장은 38세 때 여전(閭田)의 주장으로 발전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인구는 자꾸만 변하는 것이고 토지는 비척의 차이가 있어 문자 그대로 골고루 나누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에 보다 확실하게 30가를 1여로 편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토지를 공동소유해 노동일에 따라 생산물을 분배하도록 한 것이 여전의 주장이다.
오늘날 이 여전론이 다산 사상의 진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한 강진에 가면 그의 기념관이 있다. 다산의 개혁사상을 벽화로 전시하고 있는데, 여전론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1960~1970년대 중국의 인민공사나 오늘날 북한의 협동농장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한때 다산 선생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아시아공산혁명의 비조(鼻祖)로 높이 평가되기도 했다. 굳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서로 협동하며 골고루 잘사는 것이 좋은 일 아니냐며 다산의 여전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산의 경제사상이 여기서 그쳤더라면 그를 높이 평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백성의 살림을 고르게 한다는 사상은 조선왕조가 생긴 이래 전통적 정치이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성균(成均)을 최고의 이념으로 받들었다. 그 이념에 근거하여 왕조 초기부터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들이 균전을 주장했다. 과거시험을 볼 때마다 그런 주장의 답안지가 수두룩하게 쌓였다. 그 전통 위에서 다산도 처음에는 균전을 주장하다가 여전이라는 보다 철저한 성균 정책을 개발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시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유교의 경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이 60세에 이르러 다산은 여전론을 두고 “나의 38세 작품이기는 하나 지금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명확하게 못을 박았다.
그렇다면 유배 이후 다산은 어떻게 변해 갔는가. 그가 궁벽한 강진 농촌에서 본 현실은 한마디로 제도의 문란과 처절한 가난 그것이었다. 조세 제도가 바르지 않아 고을마다 조세의 종류가 다르고 농가마다 조세의 부담이 같지 않았다. 이래서는 도저히 나라라고 할 수 없으며, 그대로 두면 반드시 망하고 말 지경이었다. 군포(軍布)를 걷는 철이 되면 아전들이 농가의 소와 솥을 거둬가 처절한 울음이 하늘에 사무치는 그러한 현실이었다.
부자라고 특별히 잘사는 것도 아니었다. 흉년이 들면 소작농이 세금을 못 내니 지주가 대신 부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흉년에 망하는 것은 부자의 살림이었다. 누구 살림을 들어 누구에게 보탠다는 것인가. 그렇게 구체적 현실에서 균전이니 여전이니 하는 것은 배운 자들의 한가로운 담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 현실에서 다산이 새롭게 모색한 개혁론이 《경세유표》에 실린 정전(井田)과 구직(九職)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증산과 통상의 주장이었다. 임금이 백성의 살림살이에 개입해 골고루 나누는 것은 처음부터 될 일이 아니다. 임금이 마땅히 할 일은 생산을 늘리고 세금을 골고루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 되면 백성은 알아서 제 힘으로 저절로 잘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산은 임금이 마치 그의 장원을 관리하듯이 국토의 경영을 새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고 작은 수로를 뚫어 물을 통하게 하면 농업생산이 증가할 것이요, 크고 작은 도로를 건설하면 물자가 유통해 살림살이가 풍족해진다는 것이다. 세금은 전국 토지의 9분의 1을 공전(公田)으로 사들여 거기서 나오는 소출로 대신하자고 했다. 이것이 정전의 주장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상업과 공업과 광업과 무역도 중요하다. 중농(重農) 일변도에서 벗어나 중상(重商)과 중공(重工)의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구직의 주장이다. 그래서 다산은 말했다. 꾀를 증산(增産)과 균세(均稅)에서 찾지 않고 균산(均産)에서 찾는 것은 성인의 뜻이 아니라고. 이것이 만년에 성숙한 다산 경제사상의 핵심이다.
다산의 경제사상이 이같이 발전해 왔음은 이미 오래 전에 관련 연구자들에 의해 분명하게 밝혀졌다. 그럼에도 다산 사상의 핵심이 균전 또는 여전이라는 주장은 아직도 대세를 이루고 있다. 강진에 있는 다산 기념관의 벽화가 그 좋은 예다. 그것은 오늘날에조차 대부분의 한국인이 중세적 성균 이념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침 대통령선거의 해를 맞이했다. 후보마다 골고루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약의 보따리를 풀고 있다. 그렇지만 다산 선생은 말했다. 모두를 골고루 잘살게 하는 것은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도 어려워한 바였다고. 다산 사상의 진수를 적극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61·사진)는 한국경제사를 전공했으며, 다산 경제사상의 핵심을 꿰뚫는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고문서학회장과 경제사학회장을 역임했으며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등 저서가 있다.
다산의 경제사상은 유배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 그동안 이 점을 분명히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산 사상에 대한 이해에 적지 않은 혼란이 빚어졌다. 유배 이전 30대의 젊은 다산은 성리학의 전통적 경제사상에 충실했다. 벼슬살이에 바쁜 나머지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전도양양한 엘리트 관료로서 백성의 살림살이가 실제로 어떤지 관찰하고 경험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유배 이후 18년간 그의 정치·경제 사상은 많이 달라졌다. 역설적이게도 장기간의 유배생활은 다산에게 독자적인 경학(經學)을 개척할 행운을 안겨 주었다. 무지렁이 백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생생하게 보고, 그에 아파하고 또 분노했다. 그 변화는 크게 보아 중세를 넘어 근대를 향하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다산은 정치의 기본 임무는 백성을 골고루 잘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가. 임금은 백성의 부모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여러 아들이 있는데, 어느 아들은 잘살고 어느 아들은 못산다면 부모가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부모된 도리로써 마땅히 잘사는 아들의 살림을 들어 못사는 아들의 살림에 보태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의 이 같은 균등 이념은 토지제도와 관련해 균전(均田)의 주장으로 나타났다. 토지를 인구 수대로 골고루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균전 주장은 38세 때 여전(閭田)의 주장으로 발전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인구는 자꾸만 변하는 것이고 토지는 비척의 차이가 있어 문자 그대로 골고루 나누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에 보다 확실하게 30가를 1여로 편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토지를 공동소유해 노동일에 따라 생산물을 분배하도록 한 것이 여전의 주장이다.
오늘날 이 여전론이 다산 사상의 진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한 강진에 가면 그의 기념관이 있다. 다산의 개혁사상을 벽화로 전시하고 있는데, 여전론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1960~1970년대 중국의 인민공사나 오늘날 북한의 협동농장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한때 다산 선생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아시아공산혁명의 비조(鼻祖)로 높이 평가되기도 했다. 굳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서로 협동하며 골고루 잘사는 것이 좋은 일 아니냐며 다산의 여전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산의 경제사상이 여기서 그쳤더라면 그를 높이 평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백성의 살림을 고르게 한다는 사상은 조선왕조가 생긴 이래 전통적 정치이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성균(成均)을 최고의 이념으로 받들었다. 그 이념에 근거하여 왕조 초기부터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들이 균전을 주장했다. 과거시험을 볼 때마다 그런 주장의 답안지가 수두룩하게 쌓였다. 그 전통 위에서 다산도 처음에는 균전을 주장하다가 여전이라는 보다 철저한 성균 정책을 개발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시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유교의 경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이 60세에 이르러 다산은 여전론을 두고 “나의 38세 작품이기는 하나 지금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명확하게 못을 박았다.
그렇다면 유배 이후 다산은 어떻게 변해 갔는가. 그가 궁벽한 강진 농촌에서 본 현실은 한마디로 제도의 문란과 처절한 가난 그것이었다. 조세 제도가 바르지 않아 고을마다 조세의 종류가 다르고 농가마다 조세의 부담이 같지 않았다. 이래서는 도저히 나라라고 할 수 없으며, 그대로 두면 반드시 망하고 말 지경이었다. 군포(軍布)를 걷는 철이 되면 아전들이 농가의 소와 솥을 거둬가 처절한 울음이 하늘에 사무치는 그러한 현실이었다.
부자라고 특별히 잘사는 것도 아니었다. 흉년이 들면 소작농이 세금을 못 내니 지주가 대신 부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흉년에 망하는 것은 부자의 살림이었다. 누구 살림을 들어 누구에게 보탠다는 것인가. 그렇게 구체적 현실에서 균전이니 여전이니 하는 것은 배운 자들의 한가로운 담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 현실에서 다산이 새롭게 모색한 개혁론이 《경세유표》에 실린 정전(井田)과 구직(九職)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증산과 통상의 주장이었다. 임금이 백성의 살림살이에 개입해 골고루 나누는 것은 처음부터 될 일이 아니다. 임금이 마땅히 할 일은 생산을 늘리고 세금을 골고루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 되면 백성은 알아서 제 힘으로 저절로 잘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산은 임금이 마치 그의 장원을 관리하듯이 국토의 경영을 새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고 작은 수로를 뚫어 물을 통하게 하면 농업생산이 증가할 것이요, 크고 작은 도로를 건설하면 물자가 유통해 살림살이가 풍족해진다는 것이다. 세금은 전국 토지의 9분의 1을 공전(公田)으로 사들여 거기서 나오는 소출로 대신하자고 했다. 이것이 정전의 주장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상업과 공업과 광업과 무역도 중요하다. 중농(重農) 일변도에서 벗어나 중상(重商)과 중공(重工)의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구직의 주장이다. 그래서 다산은 말했다. 꾀를 증산(增産)과 균세(均稅)에서 찾지 않고 균산(均産)에서 찾는 것은 성인의 뜻이 아니라고. 이것이 만년에 성숙한 다산 경제사상의 핵심이다.
다산의 경제사상이 이같이 발전해 왔음은 이미 오래 전에 관련 연구자들에 의해 분명하게 밝혀졌다. 그럼에도 다산 사상의 핵심이 균전 또는 여전이라는 주장은 아직도 대세를 이루고 있다. 강진에 있는 다산 기념관의 벽화가 그 좋은 예다. 그것은 오늘날에조차 대부분의 한국인이 중세적 성균 이념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침 대통령선거의 해를 맞이했다. 후보마다 골고루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약의 보따리를 풀고 있다. 그렇지만 다산 선생은 말했다. 모두를 골고루 잘살게 하는 것은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도 어려워한 바였다고. 다산 사상의 진수를 적극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61·사진)는 한국경제사를 전공했으며, 다산 경제사상의 핵심을 꿰뚫는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고문서학회장과 경제사학회장을 역임했으며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등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