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젊은 여성을 만났는데 언뜻 보기에 외국인인가 생각했다. 더벅머리, 붉은 루즈, 색안경 쓰고 반바지에 배꼽까지 드러냈구나….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고 하루 커피도 여러 잔 즐긴다고. 차츰 무간해져(가까워져) 가계를 물으니 단군 백대손이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월전(月田) 장우성 화백(1912~2005)이 90세였던 2001년 수묵화 ‘단군일백오십대손’에 부친 화제는 그림의 모습만큼이나 내용도 청신하다. 그 정도 나이면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끄고 두툼한 내면의 담을 쌓기 마련일 텐데 여전히 눈에 불을 켜고 희한하게 돌아가는 세태에 쓴소리를 하고 있다.

서울 팔판동 한벽원갤러리에서 내달 1일까지 열리는 ‘문인본색(文人本色), 월전의 문인화 세계’전은 올해 탄생 100돌을 맞은 장우성 화백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기념전이다. 지난 4월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월전의 붓끝, 한국화 100년의 역사’전의 속편 격인 이 전시에는 그의 후반기 문인화 40여점이 걸렸다.

월전의 후기 문인화는 고답적인 정신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초기의 작품과 대조적이다. ‘황소개구리’에서는 외래문화에 잠식당하는 현실을 황소개구리 확산에 빗대어 개탄하고 있고, ‘노호(老狐·늙은 여우)’에서는 썩은 쥐를 먹고 배가 부른 늙은 여우가 호랑이 행세를 한다는 내용을 통해 부정을 저지른 자가 떳떳이 행보하는 현실을 꾸짖고 있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는 전통적인 문인화의 형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묵으로 차분하게 표현한 형상은 문인적 아취가 넘치는 필체의 화제와 더불어 그림에 높은 격조를 부여하고 있다.

월전은 미술사학자 김원룡(1922~1993)이 지적한 대로 시글씨그림이 조화를 이루는 문인적 격조를 달성한 ‘최후의 문인화가’였다. 그 형식의 틀도 전통을 답습한 게 아니다. 그의 그림에서 전통적인 붓질의 격식인 ‘준법’은 찾아보기 어렵다. 선(線)을 중시하되 작가의 개성을 담은 새로운 맛을 보여주고, 산뜻한 색채의 바림질을 덧붙여 감상자에게 수채화처럼 청신한 느낌을 선사한다.

홍선표 이화여대 교수는 월전을 “진정한 정신의 표상으로서 격조를 지닌 우리시대의 진정한 문인화가”라고 평가했다.

16일에는 월전의 회화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발표회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한정희 홍익대 교수 등이 논문을 발표한다. (02)732-3777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