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다 보면 ‘공간의 변화’ 그 이상의 의미를 주는 도시를 만날 때가 있다. 눈으로 보이는 풍경 외에 그곳의 공기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는 곳. 탈린은 그런 곳 중 하나다. 국경을 넘었을 뿐인데 시대를 건너온 기분이다. 과거로부터 수백년간 이어 내려온 역사가 곳곳에 그대로 녹아 있어 그때의 시간 그 자체를 여행하는 것 같다.

에스토니아는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발트 3국’으로 뭉뚱그려 배웠던 나라다. 따라서 탈린이 에스토니아의 수도라는 점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탈린에 닿는 순간 도시 안에 다양한 문화가 녹아 있음을 직감했다. 사연이 많은 동네인 것 같아 이곳에 숨은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밤바다를 지나 도착한 곳

항구도시 본연의 멋도 느낄 겸, 밤바다도 구경할 겸 배를 타고 발트해를 건넜다. 공교롭게도 탈린으로 가는 배 한 편이 취소돼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헬싱키~탈린 구간을 오가는 크루즈 안에는 뷔페 게임장 클럽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돼 있다.

에스토니아 물가는 근처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싼 편이다. 면세까지 되는 배 안에서는 특히 술값이 저렴해 ‘술 쇼핑’만을 위해 배를 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 때문일까. 배 안은 그 자체로 ‘움직이는 다운타운’이다. 조금은 소란스럽지만 나름의 맛이 있어 이마저도 여행의 묘미로 느껴진다.

헬싱키를 출발, 두세 시간이면 에스토니아 탈린에 도착한다. 내리는 승객만 부산할 뿐 밤바다는 고요하기만 하다. 항구에서 옛 시가까지는 차로 5분여. 눈앞에 보이는 건물, 자갈로 포장된 길, 중세풍 담벼락 하나하나가 아주 오랜 유물 같다.

○지배국만큼이나 다양한 문화

‘발트해의 자존심’ ‘발트해의 보석’이라 불리는 에스토니아. 이런 아름다운 수식어에 걸맞지 않게 역사는 뼈아프다. 스웨덴 독일 러시아 등 열강들에 종속된 채 수백년 역사를 지나오다 온전히 독립하게 된 지는 이제 고작 20년 남짓. 그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 다양한 문화와 양식이 곳곳에 여러 형태로 발현돼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강대국들의 텃밭이었던 탓일까. 몇몇 나라의 흔적이 혼재된 듯하다. 알록달록한 지붕이 독일식 건축물인가 싶으면 근처에 러시아식 사원이 있다.

‘이곳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운명적으로 ‘받아들임’에 익숙해져야 했던 이들이 지키며 지탱해온 삶, 그 이상의 ‘진짜’는 어디에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지대, ‘가진 자’들의 구역

전체 130여만명의 인구 중 3분의 1이 살고 있는 수도 탈린은 ‘덴마크 사람들의 도시’라는 뜻이다. 11세기 덴마크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형성된 이곳은 13세기 한자동맹(중세 후기 북해·발트해 연안 도시들이 상업적 목적으로 결성한 동맹)의 중심 도시가 되기도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탈린의 옛 시가지는 도보로 몇 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작다. 하지만 워낙 작은 골목이 많이 형성돼 있어 구석구석 볼거리가 풍부하다.

옛 시가지는 상인과 일반인들이 거주하던 저지대와 영주, 귀족 등 ‘있는 사람들’의 구역이던 고지대로 나뉜다. 저지대에는 과거 상인들의 건물에 식당·카페·기념품점 등이 들어서 있고, 고지대에는 교회와 각국 대사관 등 정치·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 주로 있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다.

시내 중심에는 ‘최고봉’이라는 뜻의 툼페아 언덕(Toompea Hill)이 자리잡고 있다. 해발 40m밖에 되지 않는 언덕에 왜 그런 의미가 담긴 이름이 붙었는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 전체가 평평한 탈린에서 툼페아 정도면 가히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그렇기에 쉬엄쉬엄 도보로 여행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툼페아 언덕에는 제정 러시아 시절 정교회 양식으로 지은 알렉산드르네프스키 교회가 위용을 자랑한다.

○저지대, ‘생활인’들의 터전

언덕에서 저지대 쪽으로 내려오면 넓게 펼쳐진 시청 광장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옛 시청사는 북유럽에서 유일하게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광장을 빙 둘러 있는 노천카페엔 음식을 즐기는 관광객이 많은데도 혼잡한 분위기를 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광장 부근에는 1422년부터 10대에 걸쳐 문을 열고 있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 있다. 600년도 더 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을 테니 그 누구보다 이곳 광장에 얽힌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알고 있으리라. 15세기 분위기로 꾸며놓고 에스토니아 전통식을 제공하는 식당 ‘올데 한자(Olde Hansa)’도 가볼 만한 곳이다. 내부 인테리어, 음악, 직원 복장까지 완벽한 중세풍으로 연출돼 있어 옛 시가지에서 즐기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에는 제격이다.

거리 곳곳에서는 전통 의상을 갖춘 젊은이들이 흑설탕으로 코팅해 시나몬 가루를 뿌린 아몬드와 호두를 즉석에서 볶아 팔고 있다. 그 옆에서 가만 지켜보고 있으니 맛을 보라며 아몬드를 볶던 주걱을 내민다. 가격도 비싸지 않으면서 우리 입맛에도 잘 맞아 간식으로 안성맞춤이다. 시청 광장에서는 여름철이면 수시로 장이 열린다.

○탈린 너머의 에스토니아

옛 시가지에 고스란히 담긴 중세를 벗어나 현대로 발걸음을 옮기면 탈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가 하나 더 있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인 1980년대 후반,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에서는 독립을 갈망하는 집회가 잇따랐다. 1988년 30만명가량의 에스토니아 국민들은 소련의 통치에 반대하며 광장에 모여 노래를 불렀다. 1869년부터 송 페스티벌로 이어온 노래의 전통을 살린 반폭력 저항운동이었다. 에스토니아의 독립에 ‘노래하는 혁명’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다.

이 ‘혁명’의 발상지가 바로 ‘송 페스티벌 콤플렉스(Song Festival Complex)’다. 지금도 이 무대에서는 5년에 한 번씩 노래축제가 열린다. 자연 경사를 활용해 조성한 관중석 맨 뒤편에서는 축제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 무대, 중세 도시 탈린이 한눈에 담긴다.

또 한 곳, 세계 10대 TV타워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 TV타워 전망대에서는 옛 시가는 물론 멀리 바다까지도 내려다볼 수 있다.

1971년 옛 소련이 지정한 최초의 국립공원 라헤마, ‘여름의 수도’라 불리는 해변도시 패르누 등 탈린을 조금 벗어나면 몇 시간짜리 도보여행으로는 돌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에스토니아를 만날 수도 있다.


◆ 여행 팁
핀란드서 비행기나 배로 이동…6~8월 여행 적기

에스토니아 하면 흔히 ‘마냥 추운 나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해다. 한겨울에 영하 20~30도의 혹독한 추위가 계속되고, 3~4월까지 눈이 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6~8월엔 영상 30도가량의 온화한 날씨가 이어진다. 영상 30도라고 해도 습하지 않아서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유럽지역 대다수 국가는 비자 없이 90일간 체류할 수 있다.

한국에서 에스토니아로 가는 직항은 없다. 핀란드에서 비행기나 배를 이용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 헬싱키~탈린 구간 크루즈(tallinksilja.com)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23개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레일 글로벌 패스(EurailTravel.com/kr) 소지자에겐 20~40% 할인해준다.

발트 3국 중 유일하게 유로화를 사용하며 탈린을 여행할 땐 ‘탈린 카드’를 이용하는 게 좋다. 6~72시간용(12~40유로)이 있으며 카드 한 장으로 대중교통, 박물관, 가이드투어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탈린관광청 홈페이지(tourism.tallinn.ee)를 통해 미리 구매하거나 주요 호텔, 관광안내소에서 직접 사면 된다.

공용어는 에스토니아어지만 전체 인구의 30%가량은 러시아어를 모국어에 가깝게 구사한다. 영어 실력도 수준급이어서 간단한 영어로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전압은 220V. 유럽연합(EU) 국가 중 정보기술(IT)이 가장 발전된 나라로 대부분의 호텔과 식당에서 와이파이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탈린=백은지 기자 beeeu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