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유럽 위기] WHY…위기 원인 3가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소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1849년 파리박람회에서 “유럽 대륙의 모든 민족이 하나의 형제애를 나누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로부터 160년 후인 2009년 드디어 유럽 통합 미니헌법인 리스본 조약이 발효됐다. 어렵게 이룬 유럽 통합은 불과 3년 남짓 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와 스페인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퇴출 가능성이 가시권에 접어든 것. 전문가들은 △경제상황이 다른 17개국이 단일통화를 사용했다는 점 △한계에 도달한 복지제도와 포퓰리즘 △유럽연합(EU) 리더십 부재 등을 위기 증폭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
[1] 무리하게 출범한 유로화
유럽 정치권은 세계 2차대전 이후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유럽합중국’을 꿈꿨다. 공상에 그칠 뻔했던 유럽 통합의 아이디어는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의 틈바구니 속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예상보다 빨리 실행에 옮겨졌다. 전범국 독일의 군수산업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로 시작해 상품시장→경제(통화·재정)→정치 순으로 단계적 통합 작업이 진행됐다. 1992년 마스트리흐트조약으로 유럽중앙은행(ECB) 설립과 공동통화 도입이 결정됐고 1999년 유로존 출범으로 단일통화가 이뤄졌다.
유로존 출범 초기 남유럽 국가들은 갑작스럽게 자국 통화가치가 오르면서 경제기초 체력을 키우기보단 ‘땀 흘리지 않고 얻은 과실’을 당장 향유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 ‘거품’이 꺼지면서 각종 문제가 터졌다. 부동산 가격이 30%가량 급락하면서 유럽 각국 은행들의 대규모 부동산대출은 부실채권이 돼버렸다.
유럽 위기의 도화선은 2009년 9월 집권한 그리스 사회당 정부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과거 정권의 재정통계가 엉터리”라고 고백한 사건이었다.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나면서 신용평가업체들은 그리스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했고 그리스 국채값은 걷잡을 수 없이 폭락했다. 그리스와 상황이 비슷한 것으로 평가됐던 포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도 시장의 불안한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2] 지속 불가능한 '퍼주기 복지'
유럽의 사회보장제도는 미국의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가장 본받을 만한 제도”(유러피안 드림)로 꼽을 정도로 많은 부러움을 사왔다. 유럽의 복지제도는 1960년대 고성장을 구가하던 자본주의 ‘황금기’ 때 기반이 마련됐다. 하지만 이후 유럽의 경제성장 동력이 상실되고, 인구구조가 피라미드형에서 청년층이 줄고 노년 인구가 많아진 방추형으로 바뀌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복지 혜택은 경제호황기 기준에 맞춰졌고 고령화로 제도의 수혜자는 계속 느는 반면 복지 시스템을 유지할 재정 수입은 갈수록 줄어드는 구조가 된 것이다.
그리스,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들은 유로화 도입 초기에 경제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과도한 수준의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며 재정 부담을 키웠다. 그리스에선 공무원에게 정시출근 수당까지 제공했고 연금 생활자가 인구의 23%(260만명)까지 늘었다. 정부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공무원 수를 대폭 늘리면서 재정적자는 크게 불어났다.
[3] 때놓친 대응…뒷북 리더십
EU가 그리스발 재정위기를 2년 넘도록 키워온 것은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남유럽 각국은 부유한 북유럽 국가들에 전폭적인 지원을 요구했지만 유로존의 물주 격인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은 “밑 빠진 독에 물 부을 수 없다”며 적극적인 개입을 꺼리면서 병을 키웠다.
그나마 대응 시점도 늦었다. 그리스 사태를 처음으로 논의한 2010년 2월 EU 정상회의에선 “그리스를 정치적으로 지원한다”는 정치적 수사만 나왔을 뿐 회원국에 대한 직접 지원을 금지한 리스본 조약을 핑계 삼아 직접 지원을 회피했다. 결국 그해 5월 그리스에 1100억유로 규모 구제금융을 시행키로 결정했지만 시장의 불신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27명의 난쟁이가 모여 있다”는 비아냥을 들은 EU는 리더십 공백까지 겹치며 매번 뒷북 대응으로 위기를 키웠다. 미온적 대응→위기 재발→제한적 개입→위기 확대 및 전염의 형태가 반복된 것이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1] 무리하게 출범한 유로화
유럽 정치권은 세계 2차대전 이후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유럽합중국’을 꿈꿨다. 공상에 그칠 뻔했던 유럽 통합의 아이디어는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의 틈바구니 속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예상보다 빨리 실행에 옮겨졌다. 전범국 독일의 군수산업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로 시작해 상품시장→경제(통화·재정)→정치 순으로 단계적 통합 작업이 진행됐다. 1992년 마스트리흐트조약으로 유럽중앙은행(ECB) 설립과 공동통화 도입이 결정됐고 1999년 유로존 출범으로 단일통화가 이뤄졌다.
유로존 출범 초기 남유럽 국가들은 갑작스럽게 자국 통화가치가 오르면서 경제기초 체력을 키우기보단 ‘땀 흘리지 않고 얻은 과실’을 당장 향유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 ‘거품’이 꺼지면서 각종 문제가 터졌다. 부동산 가격이 30%가량 급락하면서 유럽 각국 은행들의 대규모 부동산대출은 부실채권이 돼버렸다.
유럽 위기의 도화선은 2009년 9월 집권한 그리스 사회당 정부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과거 정권의 재정통계가 엉터리”라고 고백한 사건이었다.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나면서 신용평가업체들은 그리스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했고 그리스 국채값은 걷잡을 수 없이 폭락했다. 그리스와 상황이 비슷한 것으로 평가됐던 포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도 시장의 불안한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2] 지속 불가능한 '퍼주기 복지'
유럽의 사회보장제도는 미국의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가장 본받을 만한 제도”(유러피안 드림)로 꼽을 정도로 많은 부러움을 사왔다. 유럽의 복지제도는 1960년대 고성장을 구가하던 자본주의 ‘황금기’ 때 기반이 마련됐다. 하지만 이후 유럽의 경제성장 동력이 상실되고, 인구구조가 피라미드형에서 청년층이 줄고 노년 인구가 많아진 방추형으로 바뀌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복지 혜택은 경제호황기 기준에 맞춰졌고 고령화로 제도의 수혜자는 계속 느는 반면 복지 시스템을 유지할 재정 수입은 갈수록 줄어드는 구조가 된 것이다.
그리스,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들은 유로화 도입 초기에 경제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과도한 수준의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며 재정 부담을 키웠다. 그리스에선 공무원에게 정시출근 수당까지 제공했고 연금 생활자가 인구의 23%(260만명)까지 늘었다. 정부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공무원 수를 대폭 늘리면서 재정적자는 크게 불어났다.
[3] 때놓친 대응…뒷북 리더십
EU가 그리스발 재정위기를 2년 넘도록 키워온 것은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남유럽 각국은 부유한 북유럽 국가들에 전폭적인 지원을 요구했지만 유로존의 물주 격인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은 “밑 빠진 독에 물 부을 수 없다”며 적극적인 개입을 꺼리면서 병을 키웠다.
그나마 대응 시점도 늦었다. 그리스 사태를 처음으로 논의한 2010년 2월 EU 정상회의에선 “그리스를 정치적으로 지원한다”는 정치적 수사만 나왔을 뿐 회원국에 대한 직접 지원을 금지한 리스본 조약을 핑계 삼아 직접 지원을 회피했다. 결국 그해 5월 그리스에 1100억유로 규모 구제금융을 시행키로 결정했지만 시장의 불신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27명의 난쟁이가 모여 있다”는 비아냥을 들은 EU는 리더십 공백까지 겹치며 매번 뒷북 대응으로 위기를 키웠다. 미온적 대응→위기 재발→제한적 개입→위기 확대 및 전염의 형태가 반복된 것이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