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타치와 싸우면서 오히려 강해졌다"
“히타치와 벌인 특허 전쟁이 사운(社運)을 바꿔 놨습니다. 오히려 고맙게 생각합니다.”

류도현 탑엔지니어링 사장(49)은 일본 유수의 전자업체 히타치와의 ‘10년 악연’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2002년부터 벌여온 히타치와의 LCD(액정표시장치) 기술 관련 특허 분쟁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궁극적으로 회사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LCD 디스펜서는 TFT(초박막트랜지스터) 글라스와 필터 사이 액정을 골고루 도포해 LCD 제품을 완성하는 핵심 장비. 탑엔지니어링은 이 장비 제조 분야에서 국내 1위 업체다.

이 회사는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던 이 장비를 2001년 국산화했다. LG반도체연구원에서 근무하던 류 사장이 이 장비의 시장성을 감지해 회사를 차려 개발에 나선 것. 장비 개발에 성공하자 탑엔지니어링 제품에 대한 주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2002년 말 히타치가 한 통의 서면 경고장을 보내오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자사 특허를 침해한 것 같으니 주의하라는 통보였다. 경고장에는 수십 건의 히타치 보유 특허 목록과 탑엔지니어링이 이들 특허를 어떻게 침해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탑엔지니어링이 디스펜서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한번도 이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류 사장은 앞이 캄캄해졌다. 회사 엔지니어들을 모두 모아 놓고 머리를 쥐어 짜 내린 결론은 ‘회피 설계’였다. 예컨대 히타치가 자사가 보유한 L자형 액정분사 노즐을 탑엔지니어링이 모방했다고 하면 I자형 등으로 형태를 완전히 바꿔 버리는 것이다. 기존 제품과 다르게 형태를 바꾸면서도 성능은 그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유지해야 하는 만큼 혹독한 연구·개발(R&D)을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히타치의 서면 경고는 2006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됐다. 류 사장은 “히타치의 전략은 소송을 걸지 않고 계속 ‘귀찮게 하는(annoying)’ 것이었다”며 “침해 소송을 걸면 어떻게든 붙어볼 텐데 계속 경고장만 보내니 이에 대응하느라 에너지를 이만저만 쏟은 게 아니다”고 말했다.

양사의 갈등이 극에 달한 것은 2007년. 액정 도포시 스테이지(stage)를 X·Y축으로 움직여주는 리니어 모터 기술이 문제가 됐다. 히타치는 탑엔지니어링이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고 관련 업계에 흑색선전을 시작했다.

류 사장은 “국내뿐 아니라 심지어 중국 대만 등 어딜 가나 특허 침해 제품을 써도 되느냐는 우려가 들려왔다”며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류 사장은 2008년 초 특허청 특허심판원에 “히타치의 리니어 모터 기술은 범용 기술이므로 특허가 될 수 없다”는 취지의 특허 무효 확인소송을 냈고 2010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히타치는 국내 모 대형 로펌을 동원, 특허 출원 범위를 보정해 소송을 다시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보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지난해 말 소송이 최종적으로 일단락됐다.

류 사장은 “일단 이겼지만 히타치가 언제 또 공격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10년 특허 싸움을 계기로 ‘특허 전담조직-엔지니어-법률대리인’이 한 팀으로 움직이는 삼위일체 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류 사장은 “엔지니어들은 특허와 관련된 일을 아주 귀찮아하고 번거로워 하지만 특허를 모르면 기술을 아무리 개발해봤자 의미가 없다”며 “3자가 원활한 소통을 통해 특허 보호와 공격에 능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 사장은 지난 18일 제47회 발명의 날 기념식에서 LCD 디스펜서를 처음으로 국산화한 공로로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파주=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