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좋은 자리 뽑기…노량진 '운명의 날'
서울 노량진수산시장에서 10여년간 홍어를 팔고 있는 박모씨는 요즘 인근 교회로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고 있다. 14~15일 ‘가게 자리 재배치 추첨’을 앞두고 “좋은 자리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박씨의 가게는 통로 가장자리 점포들로 둘러싸여 있는 중앙 자리로, 목이 가장 좋지 않은 곳으로 분류된 ‘F등급’ 구역에 있다. 박씨는 “장사가 안 돼 업종 전환을 수없이 고민했지만 10년 넘게 다져온 단골과 노하우를 버릴 수 없어 계속해서 이 장사를 해왔다”며 “유일한 희망은 주어진 구역에서 좋은 자리를 배치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이 향후 3년간 매출을 좌지우지하는 ‘운명의 날’을 앞두고 초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수협중앙회는 2002년 노량진수산(주)을 인수한 뒤 2003년부터 ‘형평성’을 이유로 3년마다 추첨을 통해 자리를 재배치하고 있다.

가게 넓이(5.09㎡)는 같고 임대료도 큰 차이가 없지만 어떤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매출이 최대 10배가량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목이 좋지 않은 곳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불만을 터뜨리자 수협은 상인연합회와 합의해 3년마다 자리 재배치를 결정했다.

14일부터 이틀간 진행되는 ‘통산 4번째 자리뽑기’에는 상인 732명이 참여한다. 최상위 A급부터 F급까지 750곳이 ‘뽑기 대상’이다. 구역은 상인들의 취급 품목에 따라 활어류(213개), 선어류(271개), 패류(148개), 냉동 어류(83개) 등 네 가지로 나뉜다. A급(178개) 자리 중 145개는 단가가 비싸고 수요가 높은 활어류, F급(334개) 중 절반 이상(184개)은 선어류에 몰려 있다.

추첨 방식은 간단하다. 노량진수산시장 2층 회의실에서 사전 등록한 품목에 따라 손가락 마디만한 통을 고르면 된다. 통안에는 3년간 상인이 장사할 자리의 번호가 적혀 있다.

자리에 따라 보증금은 최대 2000만원, 월세는 20만~30만원가량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에도 상인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것은 목에 따른 매출 차이가 같은 품목에서도 최대 10배가량 나기 때문에 월세를 커버하고도 남아서다. ‘자리 뽑기’가 상인들 사이에서 ‘뽑기 올림픽’이나 ‘로또 추첨’으로 불리는 이유다.

A급 자리는 출입구에서 일자로 쭉 뻗은 넓은 통로 양쪽에 위치한 점포들. 손님 이동이 잦고 눈에 잘 띄어서다. 이곳에서 ‘청해낙지’를 운영하는 이모씨는 “작년에 비해 매출이 감소했지만 안쪽(D~F급) 자리에서 손님 구경하기 힘든 상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더 나은 A급’으로 가고 싶어하는 A급 자리 상인도 있다. ‘서산안면도’를 운영하는 윤모씨는 “뒤에 기둥이 있어 손님들 눈에 잘 띄지 않아 매출이 낮다”며 “A급도 출입구나 주차장에서 가까운 곳은 하루 100만원 이상 벌지만 기둥이 있거나 경사진 데 있는 곳들은 3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출입구나 통로 안쪽인 D~F급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에겐 ‘매출 역전’의 기회다. F급 자리에서 냉동생선을 팔고 있는 최모씨는 “길목 쪽 상인들은 하루 70만~80만원을 벌지만 우리는 10만~30만원을 번다”며 “길목 자리로 나가고 싶다”고 전했다. D급 자리에서 조개를 파는 ‘영민수산’의 박모씨도 “하루에 2만~3만원씩 버는 날이 태반”이라며 “꼭 저 앞쪽 자리(A급)에서 장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윤희은 기자 so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