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울 조계사 일대에 가면 조계종 전 종정 성철 스님(1912~1993)이 다시 온 듯하다. 조계사 옆 불교중앙박물관의 성철 스님 일대기 특별전에는 평일에도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산은 산 물은 물’ 등의 글씨를 쓴 대형 현수막도 곳곳에 내걸렸다.

성철 스님 탄생 100주년 기념 법회, 릴레이 학술포럼에 이어 성철 스님의 수행처 스물네 곳을 매달 하나씩 찾아가는 수행도량 순례단도 지난달 말부터 대장정에 올랐다. 성철 스님의 생가에 세워진 산청 겁외사를 시작으로 오는 8월 말까지 계속되는 순례에는 40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저녁 성철 스님의 사상을 공부하는 《백일법문》강좌의 열기도 뜨겁다.

이 모든 일을 기획·진행하는 주체는 백련불교문화재단. 그 중심은 이사장 원택 스님(68)이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 출가해 성철 스님의 상좌(제자)가 된 원택 스님은 마지막까지 스승을 모셨다. ‘가야산 호랑이’로 불린 성철 스님을 모시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해마다 기일 즈음이면 기념행사를 마련하고 유지를 받드는 데 앞장서 왔다. 올해는 탄생 100년 기념사업까지 더해졌다.

스님에게 ‘맛있는 만남’을 청했더니 “이 ‘맛없는 사람’을 불러줘서 고맙다”며 조계사 맞은편 사찰음식 전문점 발우공양으로 향했다. 발우공양은 조계종이 2009년 6월 불교문화를 알리기 위해 만든 사찰음식 체험공간. 개점 직후부터 인기를 끌어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다. 사찰음식은 소박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가짓수가 많고, 밥값도 고급 음식점 못지않다.

“이런 데서 만나면 스님들이 맨날 이렇게 좋은 음식 먹는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몰라.” 원택 스님은 약간의 걱정 섞인 농담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점심이라 좀 가볍게 하기로 하고 죽부터 후식까지 10가지로 이뤄진 ‘10바라밀상’을 주문했더니 시작부터 봄냄새가 묻어난다. 통상 나온다는 능이죽 대신 냉이죽이 나왔다.

▷절을 나서면 식사하는 데 불편한 게 많지 않나요.

“그래서 예전에 화엄사 주지였던 도광 스님은 도시로 나갈 일이 있으면 절 음식을 걸망에 싸가지고 다녔다고 해요.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스님들도 마찬가지죠.”

▷요샌 절에도 예전보다 음식이 풍부해졌지요.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50명이 발우공양을 하면 어른 스님부터 밥을 주욱 나누는데, 끝에 가면 밥이 모자라 다시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밥을 만들었답니다. 그 뒤로는 발우대 위로 수북이 담아 고봉밥을 먹었는데, 지금은 도로 내려갔어요. 떡, 빵, 피자 등 간식이 많아져서 주식인 밥을 덜 먹게 된 겁니다. ”

▷성철 스님은 주로 뭘 드셨습니까.

“아침에는 흰죽을 3분의 2그릇쯤 드셨어요. 거기에다 2㎜ 정도로 썬 당근 4조각, 잘게 썬 솔잎 한 숟가락, 쥐눈이콩 삶은 것 한 숟가락이 다였어요. 스님은 제가 처음 출가했던 1972년에도 소금을 안 드시는 무염식을 하고 계셨는데, 1950년대 말 간경화에 걸려 죽을 뻔한 뒤로는 완전한 무염식만 하셨죠. 그러다 보니 미각이 예민해서 도마와 칼을 따로 썼어요. 김치 썬 칼로 당근이나 솔잎을 썰면 바로 알죠. 점심, 저녁은 밥 3분의 2공기만 드셨고요. 국은 표고를 우린 물에 감자 네 쪽, 당근 네 쪽, 표고를 넣어 끓였는데 맹물맛이라 우린 못 먹었지만 스님은 맛있게 드셨어요.”

음식 이야기가 길어졌다. 원택 스님은 요즘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성철 스님 탄생 100주년 기념 법회, 일대기 전시회 준비 등으로 내내 바빴고, 학술포럼과 수행도량 순례도 시작했다. 이 모든 게 스스로 만든 분주함이다. 사실 이름난 고승도 열반하고 나면 쉬 잊혀지는 게 세태다. 내년이면 열반 20주년을 맞는 성철 스님을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건 여전히 ‘시자(侍者)’로 살고 있는 원택 스님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0년이면 긴 시간인데 어떻게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추모사업을 할 수 있습니까.

“주변에서는 ‘우리 스님을 아직도 많이 기억하는 게 다 원택이 덕이다’고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큰스님이 스스로 그렇게 해드릴 만한 ‘거리’를 갖고 계시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거죠. 그렇다고 무슨 장기계획이나 연차별 계획을 갖고 기획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 못돼요. 저절로 여기까지 왔죠. 제가 진행한 첫 추모사업이 사리탑이었는데, 큰스님 열반하고 5년 뒤에야 완성했어요. 미술사학계 원로인 황수영 박사 등이 ‘옛날 것 모방하려면 하룻밤에도 만들지만, 큰스님 사리탑은 세 가지 조건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옛날 사리탑을 흉내내서 조각하지 말 것, 거대하고 높게 하지 말 것, 우리 시대 작가에게 맡겨서 우리 시대의 조형언어로 조성할 것. 그래서 현상 공모를 했지만, 당선작이 없어 재일 여성작가 최재은 씨가 설계했죠.”

▷그 뒤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사리탑을 조성하고 나니 경남 산청군에서 스님 생가를 복원하자고 해서 3년 불사 끝에 2001년 겁외사를 창건했죠. 그 뒤 모 일간지에 스님 이야기를 6개월 동안 연재했는데, 그게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절집 생활 이야기가 뭐 읽힐까 싶었는데 말입니다. 소설가 최인호 씨한테 그 까닭을 물으니 그러더군요. ‘글이 쉽고 이를 통해 성철 스님의 전체 면모는 몰라도 어떤 분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충분히 전해주기 때문’이라고요. 그렇게 10년이 훌쩍 지나갔고, 그 뒤로는 스님이 주창하신 돈오돈수론이나 《100일법문》등을 주제로 매년 가을 열반일 즈음에 세미나와 학술대회를 열었죠.”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라는 확고한 이론을 토대로 선사이자 정통 불교학자다운 그릇을 갖추고 계셨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지, 제가 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른 고승들이 쉬 잊혀지는 데 대해서는 “모시는 사람들이 자기 스님을 잘 받드는 게 스승과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탄생 100년 기념 사업 가운데 성철 스님 이야기를 문화 콘텐츠로 개발한다는 게 눈에 띄던데요.

“20세기 대표 인물로 성철 스님이 사회에 끼친 영향과 사상가로서의 족적을 탐구해 문화 아이콘으로 21세기 한국문화의 새 비전을 제시하자는 겁니다. 일대기와 법어를 플래시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비디오클립, 웹툰, 사용자 제작 콘텐츠(UCC) 등 다양한 영상 콘텐츠로 만들 계획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불교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정보기술(IT) 시대에 맞는 스님의 이미지를 구축해야죠.”

"내년 스승 열반 20주기…이젠 내 수행길 떠나야죠"

성철 스님 상좌 원택 이사장

▷김수환 추기경 등과 달리 세상이 어려울 때 성철 스님이 사회에 기여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큰스님이 아직도 존경받는 인물로 기억되는 것에 대해 비판론자들조차 불가사의한 일이라고들 해요. 하지만 큰스님 열반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해인사에 몰려든 것은 평생 산속의 수행승으로 정치에 초연했던 것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걸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년 세월을 넘어서도 여전히 ‘성철 팬’이 많은 것은 세속 일에 관여하지 않고 산중도인(山中道人)으로 살다간 청빈의 이미지 덕분일 겁니다.”

▷“참선 잘 해라”는 말씀을 유언으로 남기고 가셨는데, 왜 일반인과 불자들한테는 3000배와 주문을 많이 외워야 하는 아비라 기도를 시켰을까요.

“당신을 친견하려면 누구에게나 3000배를 하고 오라고 했던 건, 그런 원칙을 통해 권력이나 금력, 사이비 신도들이 주변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려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같지만, 아무나 지킬 수 있는 원칙은 아니죠. 또 스님들은 선방에 가라고 바로 내쫓았지만, 일반인에게는 참선의 근기(바탕)를 갖추기 위해 3000배와 아비라 기도를 시킨 겁니다. 육체적으로 극한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기도법인데, 각자 그 고비를 넘어야 나중에 참선도 잘 됩니다. 화두는 그 뒤에 주셨죠.”

▷성철 스님은 제자들을 무섭게 야단치고 성격도 불 같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자비로워야 하지 않습니까.

“무서운 모습은 필요에 의해서 그런 것이고, 본심은 자비로우셨죠. 제가 행자 시절 공양주를 할 때였어요. 해인사 백련암에 와서 점심을 먹던 한 스님이 마루 끝에 나와 ‘이 절 공양주가 누구냐’고 소리를 질렀어요. 얼른 달려갔더니 ‘내 이빨 물어내라, 이놈아!’ 하며 손에 쥐고 있던 종이뭉치를 내동댕이쳤어요. 뭉친 종이가 펴지면서 밥알이 이리저리 튀었죠. 조리로 쌀을 일 때 실수로 돌이 들어간 거죠. 저녁 때 큰스님이 ‘그래, 이빨 값 물어줬나’ 하시기에 ‘절 생활을 잘 익히지 못하고 주변에 불편만 끼치고 있으니 하산해야 되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러면 내 이빨은 어떻게 물어줄래? 나도 니 밥 얻어먹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나’ 하셨어요. 스님께선 종종 돌을 씹었으면서도 아무 소리 안 하셨던 겁니다.”

원택 스님은 올해 출가 40년을 맞았다. 고희가 내일 모레다.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절에서 좋은 스승을 만났는데도 평생 ‘시자 원택’으로만 살아온 데 대해 아쉬움은 없을까. 원택 스님은 “큰스님이 열반하시면 바로 해방되는 줄 알았는데, 그날 이후 더 무거운 짐을 졌다”며 “내년 열반 20주기가 되면 시자 역할을 끝내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내 수행의 길을 떠날 생각”이라고 했다. 스승이 몸소 보여줬던 것처럼 진정한 수행승의 모습으로 사는 게 제자의 도리 아니겠느냐면서….


원택 스님의 단골집 발우공양

사찰음식 체험관…'10바라밀상' 등 채식 코스요리 3종

서울 조계사 길 건너편 템플스테이통합정보센터 5층에 있는 발우공양. 이름은 사찰의 전통적인 식사법에서 따온 것이다. 사찰음식의 기본적인 조리 원칙에 맞게 파 마늘 부추 달래 등 매운 맛을 내는 다섯 가지 채소(오신채)를 쓰지 않고 채식 요리를 코스로 낸다. 사찰의 일상 음식보다는 손님 상차림이나 특식에 가깝다.

메뉴는 죽부터 후식까지 각각 10, 12, 15가지로 이뤄진 10바라밀상, 12법륜지상, 15깨달음상의 세 가지다. 메뉴 형식은 같지만 내용은 계절식으로 다양하다. 샐러드, 탕, 전 등이 한두 달마다 바뀐다. 인기 메뉴인 버섯강정은 빠지지 않는다.

10바라밀상은 능이죽, 신선채소 뿌리샐러드, 삼색전, 절집 만두에 고추소스를 곁들인 계정혜삼합, 버섯강정, 마·단호박·견과류와 고소한 들깨를 넣은 사찰 보양탕, 연잎밥, 국과 찬, 과일칩·감자칩·부각과 음료를 곁들인 후식 순으로 나온다. 2만5000원. 여기에 5년근 장뇌삼과 마구이, 연과채와 연근삼색찜을 더한 12법륜지상은 3만6000원, 능이초회와 들깨전병쌈, 동충하초찜, 콩불고기 명이쌈을 추가한 15깨달음상은 5만3000원이다. 15깨달음상에서 동충하초찜 대신 송이구이와 석이버섯 요리를 추가한 15발우공양(7만원)도 있다. 10바라밀상은 점심 때만 맛볼 수 있다. (02)733-2081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