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어느날,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한 사무실. 30대 후반의 사업가가 80대 노신사에게 뭔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설명이 끝나자 노신사는 “좋은 아이디어네. 그런데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라고 물었다. 사업가는 “휴대폰 배터리처럼 쉽게 교환할 수 있게 하면 됩니다.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고 답했다.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노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석유로부터 독립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네. 힘껏 돕겠네”라고 말했다.

‘전기자동차로 석유가 필요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이스라엘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노신사는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총리였다. 페레스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총리를 두 번 지냈다. 당시 83살이던 페레스를 또다른 도전의 세계로 안내한 젊은 사업가는 샤이 아가시 베터플레이스 최고경영자(CEO)였다. 아가시는 2007년 페레스와 함께 전기차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페레스는 아가시를 적극 지원했다. 아가시의 열정은 이스라엘을 ‘전기자동차 강국’으로 바꿔놓았다.


◆‘꿈을 위해’ CEO 자리를 내던지다

아가시는 최근 한 신문과 인터뷰했다. 기자는 “신문에 실리는 부고란에 어떻게 기록되고 싶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아가시는 기다렸다는 듯 “그는 감히 꿈을 꾸었다(He dared to dream)라고 써주면 좋겠습니다”고 답했다. 질문이 이어졌다. “그 꿈이 뭡니까.” 아가시의 답은 간명했다. “석유시대를 끝내는 겁니다(To end oil).”

아가시가 이런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당시 그는 세계 최대의 기업용 소프트웨어업체 SAP에 근무하고 있었다. 회사 대표로 다보스포럼에 참석했다. 포럼 주제는 ‘2020년, 어떻게 세상을 좀 더 나은 곳(better place)으로 만들 것인가’였다. 아가시의 아이디어는 “자동차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여보자”는 것이었다. 페레스는 아가시의 연설을 들었다. 이것이 계기였다. 페레스는 아가시의 말에 이스라엘의 고민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 자신을 적대시하는 산유국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석유가 한방울도 나지 않는 나라. 이스라엘의 현실이다.

아가시는 미국으로 돌아온 뒤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러던 어느날. 실리콘밸리에 있는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모터스 소식을 들었다. 회사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사업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전기차 배터리는 일반 자동차의 엔진 역할을 한다. 배터리를 쉽게 교체할 수 있다면 전기차를 마음놓고 탈 수 있지 않을까.

2007년 초, 아가시는 결단을 내렸다. SAP를 그만두기로 한 것. 그는 SAP의 최고기술책임자(CTO)였다. CEO 후보 1순위로도 거론됐다. 아가시의 결정은 세계적 기업의 CEO 자리를 걷어찬 것이나 다름 없었다.

꿈을 찾아 CEO 자리를 내던진 아가시의 앞날은 순탄치 않았다. 전기차 개발을 위해 세계 5대 자동차업체 CEO와 면담을 요청했지만 미국 ‘빅3’인 제너럴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는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한 자동차업체 임원은 아이디어가 실현 불가능하다며 거절했다. “그런 차(순수 전기차)는 있을 수 없다. 전기와 휘발유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카만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어려움에 처한 아가시는 페레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페레스가 연결해준 이스라엘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했다. 2주 만에 이스라엘 정부가 전기차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르노닛산도 한 달쯤 지나 아가시의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8년, 그는 이스라엘에 배터리 충전소업체인 ‘베터플레이스(Better place)’를 세웠다. “페레스는 미쳐야 세상을 바꾼다고 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고 아가시는 말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혁신가가 되다

전기차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비싼 전기차를 낮은 가격에 보급할 것인가, 전기차 배터리 충전을 주유소 이용만큼 쉽고 간편하게 만들 것인가였다. 아가시의 혁신적인 사업모델은 이 물음에서 출발했다.

“베터플레이스의 전기차 사업모델은 휴대폰 사업모델과 비슷하다. (전기차를 만드는) 테슬라가 아이폰이라면 우리는 (이동통신사인) AT&T다.” 아가시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휴대폰 이용자는 단말기 할부금을 매달 통화요금과 함께 나눠서 지불한다. 2~3년 약정하면 할인혜택을 받기도 한다. 여기서 휴대폰을 차와 배터리로, 통화요금을 전기 충전요금으로 바꿔놓은 것이 베터플레이스의 사업모델이다. 그는 “전기차 이용자가 차를 4년 타면 차량과 충전요금을 할인해주고, 6년 타면 차량을 공짜로 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베터플레이스는 짧은 시간에 배터리를 갈아끼울 수 있는 충전소를 개발했다. 자동화된 기계로 작동되는 이 충전소에서 배터리를 갈아끼우는데 걸리는 시간은 65초에 불과하다. 100파운드에 달하는 무게의 배터리를 정확하고 안전하게 교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베터플레이스의 시스템은 이스라엘 전역에 깔렸다. 전기차 인프라가 된 셈이다.

아가시의 열정은 투자자들도 움직였다. 사업 초기 단기간에 2억달러의 자금을 조달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가 자금조달에 성공하자 이스라엘뿐 아니라 다른 나라와 도시들도 베터플레이스의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나섰다. 덴마크, 호주,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캐나다 온타리오주 등이다. 도이체방크는 베터플레이스의 사업모델이 “휘발유 자동차를 사라지게 할 잠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베터플레이스가 성공하면 세계 자동차산업이 제조업에서 임대형 서비스 산업으로 변화할 것이란 얘기다. 아가시는 최근 인터뷰에서 “2020년까지 이스라엘에서 아무도 휘발유 자동차를 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연약한 인간, 역설적인 도전

아가시는 대학교 때 교통사고를 당해 1년반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다시 두 발로 걷기 위해 네 차례의 고통스러운 수술을 거쳤다. 그는 “사고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fragile) 존재인지, 단 한 순간 하나의 사건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경험은 그를 매 순간 최선을 다하도록 이끌었다.

1990년 테크니온을 졸업한 아가시는 1992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소프트웨어업체 톱티어를 설립했다. 톱티어는 설립 10년 만인 2001년 4억달러에 SAP에 매각됐다. 이후 그는 SAP에서 최연소 이사가 됐다. 아버지와 함께 또 다른 이스라엘 소프트웨어업체인 퀵소프트와 톱매니지도 공동창업했다. 톱매니지 역시 2002년 SAP에 팔았다. 타임지는 2009년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에 선정했다. 2010년에는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지성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