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4월10일 오후 2시10분 보도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 초여름의 어느날 오후. 대우조선(현 대우조선해양)의 자금부 직원 한 명이 서울 명동에서 전경들에게 붙잡혔다. 이 직원은 명동 일대 단자회사(옛 투자금융회사)를 돌며 어음 결제용 자금을 구하던 중이었다. 전경들은 그를 시위대로 오인하고 인근 경찰서로 연행하려 했다. 이 직원은 가방에서 100억원짜리 어음을 보여주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해 여름, 이 직원은 비슷한 일을 몇 차례 더 겪어야 했다.


30년 넘게 재무 업무를 맡으며 대우조선해양의 최고재무책임자(CFO)와 최고경영자(CEO)까지 올랐던 남상태 전 사장이 25년 전 겪었던 일화다. 국내 기업 재무 담당자들의 핵심 업무가 ‘돈 구하기’였을 때 일어난 에피소드다.

◆‘자금’과 ‘관리’가 합쳐진 ‘경리’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기업들은 고도성장을 구가했다. 인풋(투입ㆍ이자율) 대비 아웃풋(산출ㆍ이익률)이 높으면 국내 기업들은 주저없이 투자를 했다. 때문에 대부분의 기업들은 만성적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경리부’ ‘자금부’ ‘관리부’ 등으로 불리던 재무 담당부서의 ‘경리’들은 매일 돌아오는 어음을 막느라 은행은 물론 명동 사채시장까지 기웃거리며 자금을 구하는 게 ‘지상 과제’였다.

이 시절 경리들에겐 또 하나의 업무가 추가됐다. 영업ㆍ생산 등 다른 부서의 투자ㆍ예산ㆍ비용을 통제하며 돈을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삼성그룹의 모체인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경리부는 자금과 관리가 통합됐던 이 시절 재무부서 전형으로 꼽힌다.

회사의 돈줄을 장악했던 이 시대 재무통들은 사내에서 막강한 파워를 행사했다. 각 그룹 재무담당 임직원들은 때로는 회장비서실 등에 파견돼 계열사 전체의 자금조달 및 관리를 지휘하는 ‘중앙통제 시스템’의 역할까지 담당했다. 이 시절 재무통들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CEO까지 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구학서 신세계 회장, 이수빈 전 삼성생명 회장, 최도석 전 삼성카드 부회장 등은 모두 제일제당이나 제일모직 ‘경리 출신 CEO’들이다. 현대차그룹의 박정인 전 현대모비스 회장, LG그룹 출신의 정병철 전경련 상근부회장 등도 1970~90년대 경리ㆍ자금부서장 및 임원을 맡다가 나중에 CEO를 역임했다.

◆외환위기 직후엔 ‘구조조정 전도사’로

재무통들의 역할과 위상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전면적인 변화를 맞았다. 환란으로 30대 그룹의 절반가량이 공중분해됐다. 살아 남기 위해선 부채비율을 200% 밑으로 낮춰야 했다. 이때부터 자금조달과 관리를 맡던 경리들은 ‘구조조정 전도사’로 탈바꿈한다. 선진국에서나 통용되던 CFO란 생소한 용어가 국내에 도입된 것도 이때부터다.

이 시기 각 그룹의 재무통들은 ‘구조조정본부’에 모여 계열사 경영진단을 실시하고 구조조정과 자산매각 등 재무구조 개선작업을 했다. 외환위기 직후 삼성 구조본을 이끈 이학수 전 부회장은 이 시대의 CFO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는 “계열사 사장 10명이 구조본 재무팀장 한 명을 못당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막강했던 당시의 구조본을 지휘하며 삼성의 구조조정을 이끌었다.

LG그룹에선 권영수 현 LG화학 사장이 이 시기에 ‘스타 CFO’로 부상했다. 외환위기 후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 LG노텔 등 외국합작법인을 잇따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권 사장은 2007년부터는 LG디스플레이의 CEO가 됐다.

현대차그룹에선 김원갑 현대하이스코 부회장, 채양기 전 사장 등이 환란기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CFO로 꼽힌다. 특히 채 전 사장은 현대차 CFO를 맡는 동안 1998년 기아차 인수, 2000년 다임러와의 전략적 제휴 등을 성사시켰다. 이재경 (주)두산 부회장은 두산이 2000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M&A 등을 통해 소비재기업에서 중공업기업으로 탈바꿈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경영전략과 위기대응 시스템이 핵심 과제로 부상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내 대기업 CFO의 역할은 계속 진화했다. 우선 회계 시스템 선진화 작업이 이들의 몫이었다. 2001년 미국 엔론 분식회계사태가 발생하고 국내에선 재벌에 대한 지배구조 개선 요구가 확산된 데 따른 것이다. CFO들은 분식회계 방지를 위한 내부통제 시스템 구축 작업을 도맡았다. LG GS 태평양 등의 지주회사 설립 같은 지배구조 개선작업 실무를 총괄한 것도 CFO였다.

임우돈 한국CFO협회 사무총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부터는 신성장 동력 발굴과 위기관리 시스템 구축이 CFO의 핵심 역할로 부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우량 기업들은 현금이 넘쳐나고 자금조달 비용도 낮아졌지만 신규 투자처 발굴은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다. 글로벌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이런 기업 환경은 재무와 사업성 분석에 밝은 CFO 및 재무담당자들이 부상하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CFO들은 기초 시장조사부터 사업성 분석, M&A 등 성장 방안 마련에 이르는 실무를 총괄하면서 CEO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지원ㆍ공유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최근엔 일부 재무통들이 아예 영업이나 마케팅 전선으로 나서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LG전자에서 휴대폰 국내영업을 총괄하는 나영배 전무가 대표적이다. 2001년 LG전자 재경부문팀장이던 그는 2006년 영국법인장으로 나가 유럽마케팅을 하기도 했다.

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