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 살리는 '핑크 드라이버'…300야드 넘기면 300弗씩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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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Story] '마스터스 챔피언' 버바 왓슨
6세 때 골프채 사준 아버지, 2010년 암으로 세상 떠나
한 번도 레슨 안받은 '괴짜', 우승과 함께 아들도 입양
6세 때 골프채 사준 아버지, 2010년 암으로 세상 떠나
한 번도 레슨 안받은 '괴짜', 우승과 함께 아들도 입양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내 꿈이 실현됐다고 말할 수도 없다.”
9일 제76회 마스터스 챔피언에 등극한 버바 왓슨(33·미국)은 우승을 확정지은 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는 원대한 꿈을 꾸지도 않았다고 했다. 플로리다 외곽 바그다드 출신의 ‘촌놈’인 그에게 골프는 생계를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일 뿐이었다. 시골 농장에서 자라 골프 레슨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골프채를 구해주자 혼자 장난감 플라스틱볼과 솔방울을 치면서 스윙을 배웠다.
그는 장타를 쳤지만 성격은 골프에 적합하지 않았다. 매사에 신경질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괴짜였다. 그가 변한 것은 2004년 신앙을 가지면서였다. 독실한 크리스천이 된 그는 2005년 2부투어에서 상금랭킹 21위에 올라 이듬해 투어에 데뷔했다.
그러나 2009년 11월 엄청난 시련이 다가왔다. 아버지 게리가 인후두암 진단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앤지마저 뇌종양(나중에 오진으로 판명났다)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절망 앞에 선 그에게 골프는 하찮게 느껴졌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뜻밖에도 골프가 잘되기 시작했다.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속을 끓이지 않으니까 마음과 플레이가 비로소 자유로워지더군요.”
2010년 그는 트래블러스챔피언십에서 첫승을 올리며 아버지에게 우승컵을 바쳤다. 그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려면 TV에서 나의 멋진 플레이를 많이 볼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라이더컵(미·유럽 대항전)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그의 소원대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9일 전에 라이더컵 경기를 지켜본 뒤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그린재킷과 함께 4년 넘게 걸린 입양작업을 마무리한 기쁨까지 겹쳐 두 배나 즐거워했다. 부인은 플로리다에서 입양 서류 작업을 끝내느라 오거스타에 오지 못했다. “아내가 아들(칼렙) 사진을 보내왔고 아들이 TV로 나를 봤다고 말해줬다”며 그는 감격에 겨워 했다.
그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는 ‘기부천사’로도 유명하다. 2006년 투어에 데뷔하기 전 무명 선수 시절에도 그는 패스트푸드점에서 1달러짜리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값싼 호텔에 묵으면서 2000달러를 모아 대학 여자골프대회를 여는 친구를 도와줬다.
올해는 100만달러 모금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핑의 ‘핫핑크 드라이버’로 300야드가 넘는 샷을 날릴 때마다 핑에서 300달러씩 최대 300번까지 암 환자를 돕는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로 한 것. 그는 지난해 300야드가 넘는 티샷을 483번 날렸다. 평균 드라이버샷 거리는 313.1야드다. 평소 샤프트만 분홍색 드라이버를 써왔으나 이번 자선 캠페인을 벌이면서 헤드까지 분홍색으로 바꿨다.
지난해 일본 지진 피해 구호 활동에도 5만달러를 기부했고 주니어 골프대회를 열어 모금한 2만5000달러를 투병 중인 어린이들을 위한 여름 캠프에 후원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군인들을 돕는 자선단체에 보냈다.
기부도 많이 하지만 명품도 마음껏 구입하며 인생을 즐긴다. 자동차 수집 마니아인 그는 벤츠를 좋아해 럭셔리세단에 핑크색 엠블럼으로 장식한 스포츠카, 벤츠 G-웨곤 등 세 대의 벤츠를 갖고 있다. 올초에는 1979년 미국 TV시리즈물 ‘The Dukes Of Hazzard(국내서는 ‘듀크삼총사’로 방영됨)’에 등장한 ‘제너럴 리’ 자동차를 경매를 통해 11만달러에 사들이기도 했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
9일 제76회 마스터스 챔피언에 등극한 버바 왓슨(33·미국)은 우승을 확정지은 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는 원대한 꿈을 꾸지도 않았다고 했다. 플로리다 외곽 바그다드 출신의 ‘촌놈’인 그에게 골프는 생계를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일 뿐이었다. 시골 농장에서 자라 골프 레슨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골프채를 구해주자 혼자 장난감 플라스틱볼과 솔방울을 치면서 스윙을 배웠다.
그는 장타를 쳤지만 성격은 골프에 적합하지 않았다. 매사에 신경질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괴짜였다. 그가 변한 것은 2004년 신앙을 가지면서였다. 독실한 크리스천이 된 그는 2005년 2부투어에서 상금랭킹 21위에 올라 이듬해 투어에 데뷔했다.
그러나 2009년 11월 엄청난 시련이 다가왔다. 아버지 게리가 인후두암 진단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앤지마저 뇌종양(나중에 오진으로 판명났다)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절망 앞에 선 그에게 골프는 하찮게 느껴졌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뜻밖에도 골프가 잘되기 시작했다.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속을 끓이지 않으니까 마음과 플레이가 비로소 자유로워지더군요.”
2010년 그는 트래블러스챔피언십에서 첫승을 올리며 아버지에게 우승컵을 바쳤다. 그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려면 TV에서 나의 멋진 플레이를 많이 볼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라이더컵(미·유럽 대항전)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그의 소원대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9일 전에 라이더컵 경기를 지켜본 뒤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그린재킷과 함께 4년 넘게 걸린 입양작업을 마무리한 기쁨까지 겹쳐 두 배나 즐거워했다. 부인은 플로리다에서 입양 서류 작업을 끝내느라 오거스타에 오지 못했다. “아내가 아들(칼렙) 사진을 보내왔고 아들이 TV로 나를 봤다고 말해줬다”며 그는 감격에 겨워 했다.
그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는 ‘기부천사’로도 유명하다. 2006년 투어에 데뷔하기 전 무명 선수 시절에도 그는 패스트푸드점에서 1달러짜리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값싼 호텔에 묵으면서 2000달러를 모아 대학 여자골프대회를 여는 친구를 도와줬다.
올해는 100만달러 모금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핑의 ‘핫핑크 드라이버’로 300야드가 넘는 샷을 날릴 때마다 핑에서 300달러씩 최대 300번까지 암 환자를 돕는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로 한 것. 그는 지난해 300야드가 넘는 티샷을 483번 날렸다. 평균 드라이버샷 거리는 313.1야드다. 평소 샤프트만 분홍색 드라이버를 써왔으나 이번 자선 캠페인을 벌이면서 헤드까지 분홍색으로 바꿨다.
지난해 일본 지진 피해 구호 활동에도 5만달러를 기부했고 주니어 골프대회를 열어 모금한 2만5000달러를 투병 중인 어린이들을 위한 여름 캠프에 후원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군인들을 돕는 자선단체에 보냈다.
기부도 많이 하지만 명품도 마음껏 구입하며 인생을 즐긴다. 자동차 수집 마니아인 그는 벤츠를 좋아해 럭셔리세단에 핑크색 엠블럼으로 장식한 스포츠카, 벤츠 G-웨곤 등 세 대의 벤츠를 갖고 있다. 올초에는 1979년 미국 TV시리즈물 ‘The Dukes Of Hazzard(국내서는 ‘듀크삼총사’로 방영됨)’에 등장한 ‘제너럴 리’ 자동차를 경매를 통해 11만달러에 사들이기도 했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