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품 경매를 주관하는 경매업자가 숫자에 둔감할 수도 있고, 미술분야 지식이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경매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읽는(read people)’ 것이다.” 윌리엄 루프레히트 소더비 최고경영자(CEO·56)의 말이다.

소더비는 지난해 매출 58억달러를 기록했다. 회사 설립 이후 최대 규모였다. 2010년 대비 매출 증가율은 21%로 경쟁업체인 크리스티(14%)보다 높았다. 순이익은 17억1400만달러에 달했다. 중국 부호들이 예술품 시장으로 몰린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시장이 커진다고 누구나 수혜를 보는 것은 아니다. 루프레히트는 1980년대부터 중국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미술품 경매를 시작해 시장을 선점해왔다.


◆화가와 사업가의 아들

블룸버그통신은 “루프레히트의 지난해 소득은 700만달러(79억원)로 전년 대비 18%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이 중 각종 경매를 성사시킨 데 따른 인센티브만 190만달러에 달했다.

소더비 측은 CEO의 연봉에 대해 “루프레히트가 소더비 경매소가 진행한 다수의 고부가가치 핵심사업을 성사시켰을 뿐 아니라 인터넷 경매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높은 연봉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고급 예술품, 골동품 거래의 대명사인 소더비에 1981년부터 몸담았다. 루프레히트가 CEO로 취임한 2000년 이후 소더비의 경영실적은 꾸준히 좋아지고 있다.

루프레히트는 시골 출신이다. 그는 홍콩의 경매전문잡지 ‘아츠오브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출신으로 가족들은 카우보이의 고장인 와이오밍주에 조그만 목장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시골촌뜨기였지만 루프레히트는 미술품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뉴욕 출신 화가 어머니와 기업인 아버지 밑에서 미술과 사업에 관한 감각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루프레히트는 “어머니로부터 예술가의 기질을 물려받고, 아버지로부터 돈버는 법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다”며 “성공적인 ‘토니오 크뢰거(토마스 만의 소설에 등장하는 예술가 어머니와 사업가 아버지를 둔 주인공)’가 바로 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루프레히트가 예술사업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버몬트대에서 중국미술 전문가인 아널드 쳉 교수를 만나면서부터다. 대학에서 수학, 생물학, 수의학 등을 닥치는 대로 공부했지만 자신에게 맞는 진로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쳉 교수로부터 중국 서예와 동양화를 배우면서 ‘순수미술과 조각’을 전공으로 택했다. 당시 동양미술을 전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루프레히트도 중국미술에 대한 지식이 성공의 기반이 될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 때 공부한 동양미술은 2000년대 들어 중국 부자들이 미술시장의 ‘큰손’으로 등장하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중국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 그의 몸값을 올려놓은 셈이다.

◆골동품 수선과 첫 경매 실패에서 눈 떠

대학에서 미술과 인연을 맺은 그는 졸업 후 소더비에서 인턴근무를 시작했다. ‘평생의 직장’이 결정된 셈이다. 소더비를 택한 데 대해선 “예술을 전공한 사람이 일하기에 좋은 ‘중독성’을 갖고 있었고, 쉽지 않은 도전과제가 있다는 점이 끌렸다”고 설명했다.

23세 때 인턴으로 소더비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페르시아와 터키, 중국의 태피스트리(벽걸이 직물 예술품)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10년간 아시아 미술파트에 몸담았다. 이 기간 중 온갖 ‘잡일’을 통해 고미술품의 특성을 몸으로 체득했다. 18~19세기 영국 고가구 수선작업과 가구의 짝을 맞추기 위한 레플리카(모조품) 제작 작업 등을 직접 체험했다.

그는 “소파의 모자란 짝을 맞추기 위해 복제품을 만들어 보면 고미술의 원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술품을 관리하는 것과 미술품을 파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는 입사 4년 만에 페르시아 직물과 카펫 경매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첫 경매에서 긴장감과 독감 탓에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20~30명 정도 고객 앞에 섰지만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긴장한 탓에 눈에는 눈물까지 고였다. 결국 그는 첫 경매를 포기했다. 엉망이 된 첫 경매였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경매의 본질’을 진지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루프레히트는 “기침 때문에 미술품과 고객을 연결하는 경매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순간, 최고의 경매전문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인을 기다리는 미술품을 연결해주는 사람이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후 루프레히트는 미술품에 대한 안목과 함께 고객과 미술품 간 인연을 맺어주는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했다. 1986년에는 소더비의 마케팅 이사가 됐고, 1992년에는 소더비의 글로벌 마케팅을 총괄하게 됐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는 소더비 부사장이자 아메리카 대륙 책임자로 일했다. 2000년 2월 전임 CEO가 미국 법무부로부터 반독점법 위반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되자 CEO 자리를 넘겨받았다.

◆사람을 읽다. 그리고 중국을 보다

2000년대 들어 경매 시장이 급팽창했다. 소더비도 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어려움도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예술품 시장에 불어닥친 한파로 소더비의 이익은 87% 격감했다. 루프레히트는 비용절감 차원에서 자신의 연봉과 보너스를 120만달러 삭감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루프레히트는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과정에서 기업 핵심역량과 직원들의 사기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은 채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이뤘다”며 “직원, 고객과의 공감대를 중시한 경영 스타일이 큰 효과를 냈다”고 분석했다. 시장 및 직원과 끊임없이 ‘교감’하며 경영을 해나갔다는 설명이다.

최근 중국이 세계 경제의 엔진으로 부상하자 ‘중국 미술 전문가’인 루프레히트가 이끄는 소더비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루프레히트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미술업계는 현재 미국과 유럽, 아시아라는 세개의 엔진이 합류하는 것을 보고 있다”며 “아시아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미국, 유럽과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며 소더비의 성공을 이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루프레히트는 중국 사업부문 강화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중국도자기와 중국미술 부문의 스페셜리스트 겸 일본소더비의 상무이사로 중국미술 전문가인 히라노 료이치를 선임했다. 전문가 영입을 통해 중국 사업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미술품 공급처이자 시장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뉴욕 런던 등에서 소더비가 중국 미술품 경매를 통해 올린 매출은 4억달러가 넘는다. 지난달 중국 국경절 연휴기간 소더비 홍콩 지점이 개최한 경매에선 서화 미술품 총 340점이 출품돼 7억3800만홍콩달러어치가 팔리기도 했다. 홍콩 지점 설립 이후 가장 큰 거래규모였다.

루프레히트는 “중국 수집가들의 입맛에 맞게 미술품 경매 시장을 바꿔서 재미를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지난해 소더비의 아시아 시장 매출은 사상 처음으로 10억달러를 넘어섰다. ‘30년 중국 미술통’ 루프레히트의 시선은 점점 더 중국 고객의 마음을 잡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