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3월 소비자물가와 관련, “소비자물가지수 동향과 인플레이션 압력과는 무관하다”며 애써 담담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한은 내부에선 물가가 정부와 정치권에 의해 휘둘린다면서 한은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는 데 대해 떨떠름한 반응도 보이고 있다.

신운 한은 조사국장은 2일 “소비자물가는 가계의 소비 지출액을 기준으로 산정한다”며 “정부의 무상급식, 무상보육 정책의 부수효과로 3월 물가가 떨어진 것일 뿐 인플레이션 압력이 약해졌다고 볼 수 없다”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가격은 그대로인데 가계가 쓸 돈을 정부가 대신 내주면서 수치만 내려갔다는 의미다.

한은은 이번에 소비자물가가 큰 폭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향후 통화정책 방향을 수정해나갈 뜻은 없다는 점을 시사했다. 신 국장은 “일본도 2010년 고교 무상교육 시행으로 물가는 떨어졌으나 이를 반영해 통화정책을 썼다”며 “소비자물가나 특정 물가지수만 보고 결정하지 않는다”고 재차 강조했다.

한은은 올해 소비자물가 수준에 대해서도 기존 3%대 초반 전망을 유지했다. 이재랑 한은 물가분석팀장은 “작년 말 올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3.3%로 예상했다”며 “이달 중순께 경제전망 수정치를 낼 예정이지만 현재까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발표를 지켜본 한은 내부에선 “도대체 한은은 뭘 하라는 것이냐”는 자조섞인 반응도 나왔다. 물가 관리는 한은 본연의 책무인데 정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데 대한 우려다. 수치상이긴 하지만 소비자물가가 큰 폭으로 떨어져 향후 금리를 올릴 수 있는 신축성이 더욱 약화됐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들도 앞으로 한은 운신의 폭이 위축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외국계 은행의 한 임원은 “한마디로 ‘정치물가’가 경제지표를 좌우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졌다”며 “이대로 가다간 한국의 물가정책은 경제정책이 아니라 사회정책으로 바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정치적 포퓰리즘과 정부의 복지확대정책이 의도치 않게 물가를 끌어내리는 상황이 반복될수록 물가안정을 조직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는 한은의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서정환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