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캘퍼 잡는다더니…ELW 대책에 개미들이 '희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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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W '15%룰' 이후 호가가 사라졌다
<'15%룰' = LLP, 스프레드 15% 초과때만 호가 주문>
<'15%룰' = LLP, 스프레드 15% 초과때만 호가 주문>
‘스캘퍼(초단타 매매자)가 사라져 주식워런트증권(ELW) 할 만한가 했더니….’
ELW 투자자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지난 12일 새로운 호가 규제가 시행된 후 적정 값에 종목을 사고파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속출해서다. 유동성 공급자(LP) 호가의 공백을 악용해 다른 투자자의 수익 기회를 뺏는 소위 ‘알박기’ 수법도 등장했다.
이렇게 된 배경은 지난해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ELW 시장의 불공정 논란이 끊이지 않자 금융위원회는 ‘3차 ELW시장 건전화 대책’을 내놨다. 이에 따라 이달 12일부터 LP들은 시장 스프레드(매수·매도 호가 간격) 비율이 15%를 초과할 때만 호가를 낼 수 있게 됐다. 예전엔 스프레드 20% 이내에서 자율적으로 호가를 제시할 수 있었다.
당국이 LP 호가를 규제하고 나선 것은 스캘퍼를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LP 호가 시스템을 활용해 한 틱씩 고속으로 수익을 올리는 스캘퍼들이 시장을 좌지우지한다는 판단에서다. 실제 제도 시행 이후 스캘퍼의 설 자리가 사라지면서 하루평균 ELW 거래대금은 이전의 10분의 1 수준인 500억원 규모로 급감했다.
문제는 극약 처방에 따른 부작용이다. 개인투자자들이 예기치 않은 희생양이 되고 있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내 밥에 재 뿌리지마
손절매 때 다른 투자자 '알박기'…기초자산 올라도 제값 못받아
A씨는 보유한 워런트 가격이 올라 LP가 제시한 호가로 처분하기로 했다. 하지만 주문 직전 다른 투자자가 호가를 제시하면서 LP 호가가 사라졌다. 시장 스프레드가 15% 안에 있어 LP의 유동성 공급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남은 호가는 A씨에게 불리한 가격이었다. A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홀딩’하기로 마음먹었다. 수익 기회를 날린 것이다.
더 억울한 건 기초자산(지수나 종목 주가) 가격이 유리하게 흐를 때다. LP는 유동성 공급뿐만 아니라 기초자산 변동에 따라 ELW의 적정 호가를 매기는 역할도 한다. 그런데 시장 스프레드가 15% 이내에서 이미 형성돼 있을 때는 LP가 상향한 호가가 시장에 나올 수 없다. 기초자산보다는 스프레드 비율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불합리한 현상이다.
이 같은 틈새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신종 수법도 등장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투자자가 LP 호가로 워런트를 살 때 따라 사놓은 후 매수·매도 호가를 15% 안에서 일부러 제출하는 세력이 발견된다”며 “이러면 LP 호가가 없어지면서 다른 투자자의 물량을 더 싼값에 확보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다른 투자자의 선택지를 좁히는 소위 ‘호가 알박기’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내 밥엔 재 뿌리지 말아달라(내 보유 종목에 호가를 의도적으로 걸지 말라)’는 투자자들의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
◆ 내 워런트 5원에 사세요
예탁금 도입전에 산 '까치밥' 안팔려 "20주 5원에 팝니다"
ELW 투자 경력 2년인 C씨는 최근 인터넷 게시판에 ‘내 워런트 좀 사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지난해 ELW 신규 투자자에게 1500만원의 예탁금이 도입되자 계좌를 유지하기 위해 미리 사놓았던 ‘까치밥’ 종목이 문제였다.
그는 “예탁금을 급히 써야 하는데 이 종목이 팔리지 않아 돈을 인출할 수가 없다”며 “싸게 팔겠다고 내놓은 지 1주일이 됐는데 LP 호가가 없고 거래도 없다”고 설명했다. 답답한 그는 ‘20주를 5원에 팔겠다’고 제시했고, ‘공개 매수’ 의향을 가진 사람이 하나둘 답글을 달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호가가 줄어든 데 대해 답답해하고 있다. LP의 호가 제시가 뜸해지면서 예전에 비해 종목을 사고파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LP는 “호가를 왜 안 주냐는 개인투자자들의 민원성 전화가 늘었다”며 “제도가 바뀌고 거래 규모도 줄었다고 이야기하면 투자자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라고 전했다.
호가가 촘촘하지 않다 보니 70원 이하의 저가 종목에 오히려 거래가 몰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저가 워런트는 행사 가능성이 낮은 대신 투기성이 높아 ‘시장 건전화’라는 제도의 취지를 거스른다는 지적도 나온다. LP들이 호가를 내도 스프레드 비율 8~15%로만 제출할 수 있어 고가 종목일 때보다 투자자들이 대응하기 쉽게 여긴다는 지적이다.
◆ 보따리 싸서 홍콩으로
LP 호가 제한·거래 감소…종목 다양한 홍콩으로 이탈
국내 ELW시장에서 어려움을 느낀 투자자들은 ELW시장 1위인 홍콩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홍콩 ELW는 종목이 다양할 뿐 아니라 유동성도 뛰어나다”며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을 통해 거래가 가능한 증권사를 찾는 투자자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일부 증권사는 투자자 문의가 늘자 홍콩 ELW 투자에 대한 설명회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 주식선물 거래가 크게 늘어난 것도 ELW 투자자들의 이탈이 한몫했다는 진단이다.
한 전문가는 “선물 거래는 ELW보다 자금이 많이 들고, 홍콩 ELW도 수수료와 환율 변동에 따라 손실을 입을 수 있다”며 “해외로 자금이 이탈하지 않게 국내 시장을 투자할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LP의 호가 제출 금지를 일정 구간에서 완화하거나 LP 호가를 자율화하는 대신 호가 스프레드가 특정 구간 이상일 때는 무조건 제출하도록 하는 식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거래소 관계자는 “제도 시행 보름밖에 되지 않아 좀더 지켜봐야 한다”며 “필요하면 보완대책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
ELW 투자자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지난 12일 새로운 호가 규제가 시행된 후 적정 값에 종목을 사고파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속출해서다. 유동성 공급자(LP) 호가의 공백을 악용해 다른 투자자의 수익 기회를 뺏는 소위 ‘알박기’ 수법도 등장했다.
이렇게 된 배경은 지난해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ELW 시장의 불공정 논란이 끊이지 않자 금융위원회는 ‘3차 ELW시장 건전화 대책’을 내놨다. 이에 따라 이달 12일부터 LP들은 시장 스프레드(매수·매도 호가 간격) 비율이 15%를 초과할 때만 호가를 낼 수 있게 됐다. 예전엔 스프레드 20% 이내에서 자율적으로 호가를 제시할 수 있었다.
당국이 LP 호가를 규제하고 나선 것은 스캘퍼를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LP 호가 시스템을 활용해 한 틱씩 고속으로 수익을 올리는 스캘퍼들이 시장을 좌지우지한다는 판단에서다. 실제 제도 시행 이후 스캘퍼의 설 자리가 사라지면서 하루평균 ELW 거래대금은 이전의 10분의 1 수준인 500억원 규모로 급감했다.
문제는 극약 처방에 따른 부작용이다. 개인투자자들이 예기치 않은 희생양이 되고 있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내 밥에 재 뿌리지마
손절매 때 다른 투자자 '알박기'…기초자산 올라도 제값 못받아
A씨는 보유한 워런트 가격이 올라 LP가 제시한 호가로 처분하기로 했다. 하지만 주문 직전 다른 투자자가 호가를 제시하면서 LP 호가가 사라졌다. 시장 스프레드가 15% 안에 있어 LP의 유동성 공급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남은 호가는 A씨에게 불리한 가격이었다. A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홀딩’하기로 마음먹었다. 수익 기회를 날린 것이다.
더 억울한 건 기초자산(지수나 종목 주가) 가격이 유리하게 흐를 때다. LP는 유동성 공급뿐만 아니라 기초자산 변동에 따라 ELW의 적정 호가를 매기는 역할도 한다. 그런데 시장 스프레드가 15% 이내에서 이미 형성돼 있을 때는 LP가 상향한 호가가 시장에 나올 수 없다. 기초자산보다는 스프레드 비율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불합리한 현상이다.
이 같은 틈새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신종 수법도 등장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투자자가 LP 호가로 워런트를 살 때 따라 사놓은 후 매수·매도 호가를 15% 안에서 일부러 제출하는 세력이 발견된다”며 “이러면 LP 호가가 없어지면서 다른 투자자의 물량을 더 싼값에 확보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다른 투자자의 선택지를 좁히는 소위 ‘호가 알박기’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내 밥엔 재 뿌리지 말아달라(내 보유 종목에 호가를 의도적으로 걸지 말라)’는 투자자들의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
◆ 내 워런트 5원에 사세요
예탁금 도입전에 산 '까치밥' 안팔려 "20주 5원에 팝니다"
ELW 투자 경력 2년인 C씨는 최근 인터넷 게시판에 ‘내 워런트 좀 사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지난해 ELW 신규 투자자에게 1500만원의 예탁금이 도입되자 계좌를 유지하기 위해 미리 사놓았던 ‘까치밥’ 종목이 문제였다.
그는 “예탁금을 급히 써야 하는데 이 종목이 팔리지 않아 돈을 인출할 수가 없다”며 “싸게 팔겠다고 내놓은 지 1주일이 됐는데 LP 호가가 없고 거래도 없다”고 설명했다. 답답한 그는 ‘20주를 5원에 팔겠다’고 제시했고, ‘공개 매수’ 의향을 가진 사람이 하나둘 답글을 달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호가가 줄어든 데 대해 답답해하고 있다. LP의 호가 제시가 뜸해지면서 예전에 비해 종목을 사고파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LP는 “호가를 왜 안 주냐는 개인투자자들의 민원성 전화가 늘었다”며 “제도가 바뀌고 거래 규모도 줄었다고 이야기하면 투자자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라고 전했다.
호가가 촘촘하지 않다 보니 70원 이하의 저가 종목에 오히려 거래가 몰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저가 워런트는 행사 가능성이 낮은 대신 투기성이 높아 ‘시장 건전화’라는 제도의 취지를 거스른다는 지적도 나온다. LP들이 호가를 내도 스프레드 비율 8~15%로만 제출할 수 있어 고가 종목일 때보다 투자자들이 대응하기 쉽게 여긴다는 지적이다.
◆ 보따리 싸서 홍콩으로
LP 호가 제한·거래 감소…종목 다양한 홍콩으로 이탈
국내 ELW시장에서 어려움을 느낀 투자자들은 ELW시장 1위인 홍콩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홍콩 ELW는 종목이 다양할 뿐 아니라 유동성도 뛰어나다”며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을 통해 거래가 가능한 증권사를 찾는 투자자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일부 증권사는 투자자 문의가 늘자 홍콩 ELW 투자에 대한 설명회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 주식선물 거래가 크게 늘어난 것도 ELW 투자자들의 이탈이 한몫했다는 진단이다.
한 전문가는 “선물 거래는 ELW보다 자금이 많이 들고, 홍콩 ELW도 수수료와 환율 변동에 따라 손실을 입을 수 있다”며 “해외로 자금이 이탈하지 않게 국내 시장을 투자할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LP의 호가 제출 금지를 일정 구간에서 완화하거나 LP 호가를 자율화하는 대신 호가 스프레드가 특정 구간 이상일 때는 무조건 제출하도록 하는 식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거래소 관계자는 “제도 시행 보름밖에 되지 않아 좀더 지켜봐야 한다”며 “필요하면 보완대책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