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人스포츠] 은퇴 앞둔 K리그 전설, "목표가 생기니 오히려 후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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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1 경기 출전, 포항 김기동… 축구인생 두 번 산 K리그의 신화
-'제3의 인생' 도전하는 스마트 미드필더 프로축구 포항스틸러스의 ‘레전드’ 김기동(40)이 공식 은퇴식을 끝으로 ‘제3의 축구인생’을 시작한다.
포항은 오는 17일 포항시 남구 괴동에 위치한 스틸야드에서 열리는 '현대오일뱅크 K리그 2012' 3라운드 부산과의 경기에서 김기동의 은퇴식이 진행 할 에정이다.
숱한 역경을 딛고 현역 생활을 마감하는 김기동은 두 번의 축구인생을 살아온 'K리그의 전설'로 통한다. 축구로 주목 받던 학창 시절도, 화려한 대표팀 경력도 그에게는 먼 나라 얘기였기 때문이다.
21년간의 축구선수로 살아온 그는 "후회는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또 다른 목표가 생기니 오히려 후련하다고 했다. 그라운드의 '철인'에서 스마트한 지도자로 변신을 준비하고 있는 김기동을 마포구 신수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꼬마' 기동이, 오직 땀 방울로 잡은 기회
"나는 객관적으로 봐도 축구선수로써 장점이 많지 않은 하드웨어다. 170cm도 넘지 않는 키에 그렇다고 매시에 '폭풍 드리블' 같은 장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웃음)" 하지만 그는 타고난 장기가 없었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고 강조했다.
사실 김기동은 전문 코치하나 없는 초등학교에서 축구와 '첫'인연을 맺었다. 11살 때인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충북 당진에 위치한 송악초등학교는 당시 축구부는 있었지만 체육선생님이 코치와 감독을 겸하는 구조였다.
그는 체계적인 훈련도 없이 처음 출전한 군 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내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김기동은 센터포드로 뛰었던 당시 대회에서 1경기에 6골을 넣기도 했었다고 회고했다. '꼬마' 기동이의 화려한 데뷰전이었던 셈이었다.
김기동은 학창시절 '영리하게 플레이 한다'는 평은 많이 들었지만 주목의 정도가 강렬하지 못했다. 다행히 고졸연습생 자격으로 프로에 첫발을 들였지만 왜소한 체격 조건 탓에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축구가 좋았다고 말하는 그는 당시 심정에 대해 "이렇게 연습생으로 끝나버리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고 전했다. 불안함에 머리가 복잡할 때면 선배들이 모두 잠든 한 밤중에도 운동장에 나가 몇 바퀴씩 뛰고 들어오곤 했다고. 하지만 준비하면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과 자신감 만큼은 한 순간도 잃지 않았다.
그는 1993년 유공(현 제주유나이티드)으로 둥지를 옮기면서 축구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제2의 축구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니폼니시 감독에서 장래성을 인정받으며 그의 축구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2003년, 김기동은 연습생 시절 인연을 맺었던 친정 포항으로 컴백했고, 따바레즈(브라질), 황지수, 황진성 등과 함께 '최강’ 미드필드를 이끄는 핵심으로 떠올랐다. 방출됐던 팀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40-40클럽, '제3의 축구 인생'서 꼭 이뤄야 할 숙제
그는 기록의 사나이다. 특히 500경기 출장은 필드플레이로서 앞으로도 깨기 힘든 기록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병지(경남)가 이미 보유하고 있던 이 기록은 그가 특수 포지션인 '골키퍼'라는 점을 감안하면 필드 플레이어의 500경기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김병지 조차 향후 후배들 중 누군가 이 기록을 달성하는 선수가 생긴다면 금전적 후원까지 마다하지 않겠다고 공헌을 했을 정도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는 만 20년 선수생활의 훈장이라고 할 수 있는 40-40클럽(골-어시스트) 가입에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은퇴를 선언한 그는 40-40 달성에 한 골이 부족한 '39-40'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축구 계에 종사하는 누구도 한 골을 남겨둔 그가 40-40클럽에 가입되지 못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40-40 가입과 관련해 "기록 자체에 연연했다면 어떻게든 달성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며 "하지만 개인적으로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 하는 성격이어서 모자라는 1골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남겨 놓은 마지막 한 골이 있어 오히려 마음 편하다"며 "보통 축구선수들은 인생 이모작(선수,지도자 또는 사업 등)을 하는데, 산전수전 다 겪고 축구인생의 '롤러코스터' 까지 경험해 봤으니, 난 제3의 인생을 준비하는 셈"이라며 지나온 축구인생을 재치있게 표현했다.
그는 "못 이룬 40-40의 기록은 제3의 축구인생에서 반드시 넣을 것"이라면서 "유럽으로 지도자 연수를 다녀온 뒤 어떤 방식으로 든 후배들과 축구산업에 도움 되는 사람으로 살아 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지도자 첫발은...나의 사랑~ 포!항!에서
김기동은 다음달 네덜란드로 출국한다. 에인트호벤의 유소년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서다. 스페인 대표팀의 훈련 참관 계획도 가지고 있다.
유학길에 오르는 그의 꿈은 무엇일까.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돌이켜보면 다양한 스타일의 감독님들 밑에서 프로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나는 큰 행운아 인 것 같다"라며, "감독님들 마다 추구하는 바가 달랐지만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들께 보고 배운 장점을 분석해 '김기동'식 지도법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K리그에서도 유독 사연 많은 감독과 한솥밥을 먹어왔기 때문에 다양한 축구 스타일을 접했고,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 스폰지처럼 흡수하는 독창성으로 늘 팀의 중심에 있어 왔다.
그는 유학 길을 열어준 구단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그 동안 많은 배려와 관심으로 20년 축구생활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구단과 포스코에 감사한다"며 "프로 첫 발도 포항이었고 마지막 발 걸음도 포항에서 시작하는 만큼, 좋은 지도자로 팀 발전에 기여 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습생으로 입단한 구단에서 선수감원 대상으로 분류되며 방출됐던 그가 20년이 지나서야 그때 그 팀에서 명예로운 은퇴를 맞이하게 됐으니 '보은'에 대한 감회가 남 다른 건 특이한 일도 아닐 법하다.
김기동은 늘 축구에 한해 자신을 '행운아'라고 말한다. 연습생으로 시작한 "'꼬마' 기동이"가 K리그 최다 출전(필드플레이어=501경기), K리그 최고령 득점선수(39세 5개월27일), 최고령 도움선수(39세 3개월24일) 등 의미 있는 대기록을 뒤로하고 명예롭게 그라운드를 떠나기 때문이란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철저한 자기 관리와 노력으로 시련을 딛고 일어나 K리그의 전설이 돼버린 그가 '제3의 축구인생'을 맞이하기 위해 스타트 라인에 섰다.
아쉬움 보다 목표가 생기니 오히려 후련하다고 말하는 포항의 영원한 레전드 김기동. '제3의 축구인생'에서 그가 펼칠 40-40의 마지막 '한 골'을 유쾌한 상상 속에 기대해본다.
한경닷컴 유정우 기자 seeyou@hankyung.com
-'제3의 인생' 도전하는 스마트 미드필더 프로축구 포항스틸러스의 ‘레전드’ 김기동(40)이 공식 은퇴식을 끝으로 ‘제3의 축구인생’을 시작한다.
포항은 오는 17일 포항시 남구 괴동에 위치한 스틸야드에서 열리는 '현대오일뱅크 K리그 2012' 3라운드 부산과의 경기에서 김기동의 은퇴식이 진행 할 에정이다.
숱한 역경을 딛고 현역 생활을 마감하는 김기동은 두 번의 축구인생을 살아온 'K리그의 전설'로 통한다. 축구로 주목 받던 학창 시절도, 화려한 대표팀 경력도 그에게는 먼 나라 얘기였기 때문이다.
21년간의 축구선수로 살아온 그는 "후회는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또 다른 목표가 생기니 오히려 후련하다고 했다. 그라운드의 '철인'에서 스마트한 지도자로 변신을 준비하고 있는 김기동을 마포구 신수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꼬마' 기동이, 오직 땀 방울로 잡은 기회
"나는 객관적으로 봐도 축구선수로써 장점이 많지 않은 하드웨어다. 170cm도 넘지 않는 키에 그렇다고 매시에 '폭풍 드리블' 같은 장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웃음)" 하지만 그는 타고난 장기가 없었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고 강조했다.
사실 김기동은 전문 코치하나 없는 초등학교에서 축구와 '첫'인연을 맺었다. 11살 때인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충북 당진에 위치한 송악초등학교는 당시 축구부는 있었지만 체육선생님이 코치와 감독을 겸하는 구조였다.
그는 체계적인 훈련도 없이 처음 출전한 군 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내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김기동은 센터포드로 뛰었던 당시 대회에서 1경기에 6골을 넣기도 했었다고 회고했다. '꼬마' 기동이의 화려한 데뷰전이었던 셈이었다.
김기동은 학창시절 '영리하게 플레이 한다'는 평은 많이 들었지만 주목의 정도가 강렬하지 못했다. 다행히 고졸연습생 자격으로 프로에 첫발을 들였지만 왜소한 체격 조건 탓에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축구가 좋았다고 말하는 그는 당시 심정에 대해 "이렇게 연습생으로 끝나버리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고 전했다. 불안함에 머리가 복잡할 때면 선배들이 모두 잠든 한 밤중에도 운동장에 나가 몇 바퀴씩 뛰고 들어오곤 했다고. 하지만 준비하면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과 자신감 만큼은 한 순간도 잃지 않았다.
그는 1993년 유공(현 제주유나이티드)으로 둥지를 옮기면서 축구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제2의 축구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니폼니시 감독에서 장래성을 인정받으며 그의 축구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2003년, 김기동은 연습생 시절 인연을 맺었던 친정 포항으로 컴백했고, 따바레즈(브라질), 황지수, 황진성 등과 함께 '최강’ 미드필드를 이끄는 핵심으로 떠올랐다. 방출됐던 팀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40-40클럽, '제3의 축구 인생'서 꼭 이뤄야 할 숙제
그는 기록의 사나이다. 특히 500경기 출장은 필드플레이로서 앞으로도 깨기 힘든 기록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병지(경남)가 이미 보유하고 있던 이 기록은 그가 특수 포지션인 '골키퍼'라는 점을 감안하면 필드 플레이어의 500경기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김병지 조차 향후 후배들 중 누군가 이 기록을 달성하는 선수가 생긴다면 금전적 후원까지 마다하지 않겠다고 공헌을 했을 정도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는 만 20년 선수생활의 훈장이라고 할 수 있는 40-40클럽(골-어시스트) 가입에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은퇴를 선언한 그는 40-40 달성에 한 골이 부족한 '39-40'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축구 계에 종사하는 누구도 한 골을 남겨둔 그가 40-40클럽에 가입되지 못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40-40 가입과 관련해 "기록 자체에 연연했다면 어떻게든 달성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며 "하지만 개인적으로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 하는 성격이어서 모자라는 1골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남겨 놓은 마지막 한 골이 있어 오히려 마음 편하다"며 "보통 축구선수들은 인생 이모작(선수,지도자 또는 사업 등)을 하는데, 산전수전 다 겪고 축구인생의 '롤러코스터' 까지 경험해 봤으니, 난 제3의 인생을 준비하는 셈"이라며 지나온 축구인생을 재치있게 표현했다.
그는 "못 이룬 40-40의 기록은 제3의 축구인생에서 반드시 넣을 것"이라면서 "유럽으로 지도자 연수를 다녀온 뒤 어떤 방식으로 든 후배들과 축구산업에 도움 되는 사람으로 살아 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지도자 첫발은...나의 사랑~ 포!항!에서
김기동은 다음달 네덜란드로 출국한다. 에인트호벤의 유소년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서다. 스페인 대표팀의 훈련 참관 계획도 가지고 있다.
유학길에 오르는 그의 꿈은 무엇일까.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돌이켜보면 다양한 스타일의 감독님들 밑에서 프로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나는 큰 행운아 인 것 같다"라며, "감독님들 마다 추구하는 바가 달랐지만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들께 보고 배운 장점을 분석해 '김기동'식 지도법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K리그에서도 유독 사연 많은 감독과 한솥밥을 먹어왔기 때문에 다양한 축구 스타일을 접했고,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 스폰지처럼 흡수하는 독창성으로 늘 팀의 중심에 있어 왔다.
그는 유학 길을 열어준 구단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그 동안 많은 배려와 관심으로 20년 축구생활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구단과 포스코에 감사한다"며 "프로 첫 발도 포항이었고 마지막 발 걸음도 포항에서 시작하는 만큼, 좋은 지도자로 팀 발전에 기여 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습생으로 입단한 구단에서 선수감원 대상으로 분류되며 방출됐던 그가 20년이 지나서야 그때 그 팀에서 명예로운 은퇴를 맞이하게 됐으니 '보은'에 대한 감회가 남 다른 건 특이한 일도 아닐 법하다.
김기동은 늘 축구에 한해 자신을 '행운아'라고 말한다. 연습생으로 시작한 "'꼬마' 기동이"가 K리그 최다 출전(필드플레이어=501경기), K리그 최고령 득점선수(39세 5개월27일), 최고령 도움선수(39세 3개월24일) 등 의미 있는 대기록을 뒤로하고 명예롭게 그라운드를 떠나기 때문이란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철저한 자기 관리와 노력으로 시련을 딛고 일어나 K리그의 전설이 돼버린 그가 '제3의 축구인생'을 맞이하기 위해 스타트 라인에 섰다.
아쉬움 보다 목표가 생기니 오히려 후련하다고 말하는 포항의 영원한 레전드 김기동. '제3의 축구인생'에서 그가 펼칠 40-40의 마지막 '한 골'을 유쾌한 상상 속에 기대해본다.
한경닷컴 유정우 기자 see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