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0종. 지난해 교보문고에서 팔린 김영사 책의 가짓수다. 김영사가 한 해 펴내는 신간은 200여종. 발간한 지 1년 이상 된 책들이 아직도 많이 팔리고 있다는 증거다. 박은주 김영사 대표(55)는 “30년 전 만든 책이 지금도 팔린다”며 “구간(舊刊) 판매 비율은 김영사가 가장 높다”고 말한다. 반짝 유행하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책이 아니라 숨이 긴,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읽히는 책을 만들고 있다는 점, 그게 박 대표의 자랑이다.

박은주 김영사 대표 "사회에 필요한 책 만든다 생각…베스트셀러는 따라오더군요"

▶김영사에서 낸 책의 생명력이 강하네요.

“이 사회에 필요한 책인가를 봅니다. 펴내야 할 이유가 충분한 책인가, 내가 읽고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인가를 묻습니다. 어떤 철학적 가치를 갖고 있는 책이냐도 중요하죠. 이런 책이라면 사회에 필요한 책일 테고, 그럼 독자들이 사서 읽겠죠.”

▶어떤 책을 낼지 선택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요.

“마지막 결정은 제 마음 속 판단에 맡깁니다. 시장조사 자료 등을 참고하지만 의존하지는 않아요. 제 생각, 아니 마음에 따라 결정합니다. 이 일을 30년 넘게 했는데요. 경험에서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정교해졌다고 볼 수 있겠죠.”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컨셉트를 잡고 디자인, 제목을 확정한 뒤 마케팅 전략을 짜기까지 김영사 식구들이 다 함께 합니다. 저는 매 단계 부족하다 싶은 부분을 채워넣을 수 있도록 조언해주죠. 제가 경력 30년 된 기획자이자 편집자잖아요. 마지막 10% 결정도 제 몫이에요. 0.1㎜ 오차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점 하나, 선 한 줄, 글자의 미세한 간격 차이에서 세련됨과 유치함, 촌스러움과 고급스러움이 갈리죠.”

▶책 품질에 관한 한 결벽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2004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의 초판 3000부를 전량 회수한 적이 있어요. 표지 본문의 디자인과 제본 방식이 책의 컨셉트에 맞지 않았던 거예요. 지난해 낸 정민 교수의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도 2쇄부터 표지 디자인을 바꿨어요. ‘그만하면 됐다’고 눈감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가 그렇게 배웠어요. 초창기 김영사에서 재미를 붙여 책을 만들 때 일입니다. 창업자인 김정섭 전 사장이 서점에 납품한 책을 전량 회수하라고 하시더군요. 콘텐츠 문제가 아니라 디자인과 제본 상태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죠. 출판사는 수없이 쏟아내는 책들이 독자에게는 단 한권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그런 정성에 선구안도 좋아서인지 베스트셀러가 참 많습니다.

“김영사는 책을 3000종이나 냈습니다.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이 1000종이라고 하네요. 종합은 아니고, 분야별 베스트셀러 10위권에 든 책들이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정의란 무엇인가》등이 100만부를 넘겼죠.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앗! 시리즈》는 1000만부 이상 팔렸어요.”

▶내심 베스트셀러를 노리나요.

“치명적인 병이 베스트셀러 병이에요. 적게 팔리는 것은 경시하게 되죠.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은 3000부, 5000부만 팔려도 내야 해요. 근데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10만부, 30만부 하는 식으로 욕심이 생기죠. 과다한 투자를 하고, 실패해 손해를 보죠. 베스트셀러는 주어지는 겁니다. 목적이 되면 큰일납니다. 사회에 필요한 책이 무엇이고, 행복하게 만드는 책이 무엇인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 서점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군요.

“숫자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죠. 숫자에 저 자신을 옭아매는 우(愚)를 범하지 않게요. 10등 하면 5등 하고 싶고, 5등 하면 1등 하고 싶어지죠. 그 등수는 의미없다는 걸 알아요. 매출이 떨어져도 그때 필요한 책을 냈다고 생각하면 만족해요. 김영사는 책을 많이 팔아 매출을 올리는 그런 회사가 아닙니다. 숫자 이면의 가치를 중시하죠. 출판계를 경험해 보니까 10:20법칙이 있더라고요. 10년이 지나면 20%만이 살아남는다는 거죠. 오래 살아남으려면 크게 벌이지 않고, 가치있는 일, 보람된 일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도 재미있게요.”

▶가치있는 책을 내다 보니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말씀이죠?

“《정의란 무엇인가》는 팔리지 않더라도 내려고 했어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 2만명이라도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공감하는 독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출간을 결정했죠. 의외로 제가 몰랐던 100만명이 넘는 독자분들이 책을 찾아주신 거예요. 사회에 필요한 책을 냈지, 팔릴 책을 낸 게 아닙니다. 우리 독자들 수준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독자들 안목에 맞추려면 부단히 배우고 노력해야죠.”

▶매일 조회를 하고, 직원들과 함께 회사 청소를 한다면서요.

“오전 8시 30분에 조회를 해요. 하루 10분, 다 모여 얼굴을 보죠. 저는 이걸 ‘10분의 기적’이라고 불러요. 서로 인사하고 정보도 전하는 자리입니다. 마음의 소통에 중점을 둔 시간이에요. 아날로그적인가요. 돌아가면서 1분 스피치를 하고, 각자 맡은 구역을 청소하죠. 윗사람 아랫사람이 없어요. 1989년 서른두 살에 대표가 됐을 때 사내에서 ‘미스’ ‘미스터’하는 호칭을 없앴어요. ‘김영사 사람이 알고 마음에 새겨 실행할 일’(명심문), ‘김영사 신입 직원이 알아둘 일’ 등 회사생활 규칙도 만들었죠. 나이 등에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김영사 식구들은 배려하고 양보할 줄 알아요. 팀플레이를 해야 하는 일이어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능력보다 성품을 봐요. 그런 다음 프로가 되도록 교육을 시키죠. 누군가 ‘김영사는 자유와 질서가 공존하는 회사인 것 같다’고 말했는데 대단한 찬사가 아닌가요.”

▶거래처와의 관계가 남다르다던데.

“20년 넘게 거래하고 있죠. 회사가 커졌다고 해서 기존의 작은 거래처와 관계를 끊으면 되나요. 거래처는 함께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어요. 하다 보니 세대가 바뀌어 아들이 사장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 가끔 큰 인쇄소나 제본소에서 거래하자고 연락하면 이렇게 말하죠. ‘기존 거래 우선 원칙이 있습니다. 일이 늘어나면 고려해보겠습니다’고요. 거래처는 김영사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출간이 급할 때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거예요.”

▶상장 계획은 없습니까.

“8년 전 코스닥 붐이 불었을 때 국민의 기업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3년 정도 진행했죠. 투자도 받고요. 그런데 안 되겠더라고요. 길이 달라요. 우리의 목표는 ‘사회를 유익하게, 세상을 행복하게’예요. 매출 등 수치가 중요한 게 아니죠.”

▶전자책 시장이 커지고 있습니다만.

“전자책에 대해서는 보수적으로 가고 있어요. 시장이 아직 안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글꼴이나 저작권 문제 등 선결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하반기부터는 적극적으로 출시하려고요.”

▶매일 108배를 하고 금강경도 읽는다고 들었습니다.

“마음을 쉬는 거예요.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해주면 올바른 판단력이 나오고, 위기 없이 회사를 이끌 수 있죠. 기업인일수록 마음 공부가 중요해요.”

▶10년 뒤 김영사는 어떤 모습일까요.

“3년 뒤 일도 궁금해요. 지금하고 다른 모습으로 있지 않을까요. 굉장히 근사한 모습으로, 멋진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해요.”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