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주가 영하 12도를 가리키던 지난 1월의 어느 밤, 서울 시내 경찰서에 한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그는 경찰서 문을 열고 “이제 겨우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당직을 서던 형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자의 온몸에 이빨 자국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동물이 아닌 사람이 만든 상처였다.

이 황당한 사태의 발단은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이었다. 이빨 자국으로 뒤덮인 채 경찰서로 뛰어들어온 최씨(60)는 지난해 11월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한 여성과 두 달 동안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문제는 최씨의 내연녀 윤씨(54)가 밀담으로 가득찬 카카오톡 대화창을 보게 된 것. 윤씨는 자신과도 불륜 관계를 맺고 있는 주제에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며 최씨를 물어뜯었다고 한다. 최씨는 형사들에게 “스마트폰이 뭔지…”란 푸념을 남기고는 경찰서를 나섰다.

◆똑같은 말도 매체에 따라 다른 의미

“미디어는 메시지다.” 세계적 미디어학자 마셜 매클루언의 오래된 경구(警句)다. 똑같은 내용의 메시지라도 어떤 매체를 통해 전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맥락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가령 “급전이 필요하니 100만원만 빌려다오”라는 말을 편지지에 정성껏 적어 친구에게 보낸다면 “무슨 일이냐”며 걱정어린 목소리의 전화를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똑같은 내용을 친구에게 전송했다면 “어떤 사기꾼이 낚시질을 하는구나”라고 무시당할 가능성이 높다.

기술의 발전은 소통 수단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단어 ‘유비쿼터스(ubiquitous)’는 통신 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현실이 됐다.

과거에는 데이트를 한 번 하려면 상대방의 집전화로 연락해 약속을 잡아야 했다. 어느 한 사람이 사정이 생겨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릴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펄시스터즈는 1968년 발표한 ‘커피 한 잔’이란 노래를 통해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8분이 지나고 9분이 오네. 1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라고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요즘은 그럴 필요가 없다.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든 문자를 보내든 연락해 어디쯤 오는지 확인하면 될 일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상대방이 오지 않는다고 글을 올리며 심심한 마음을 달랠 수도 있다.

소통 수단이 늘어나면서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도 변했다. 과거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선 현실세계에서 얼굴을 맞대는 수밖에 없었다. 펜팔과 같은 원거리 만남도 있었지만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지금은 만남의 수단이 도처에 널려 있다. 온라인 동호회도 얼마든지 있고 스마트 디바이스의 GPS(위성 위치확인 시스템)를 통해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과 즉석 만남을 할 수도 있다. 굳이 오프라인까지 관계를 확대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온라인 친구’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인간관계의 본질은 동일

과거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1955년 6월4일자 한 일간지에는 ‘사랑의 편지가 유죄’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전북 장흥에서 2개월 전 시체로 발견된 정씨(32)를 살해한 2명의 범인을 잡았다는 내용이다. 범행 동기는 정씨의 연애편지였다. 정씨는 같은 마을에 사는 미망인 성씨(26)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성씨에게 건넬 연서(戀書)를 항상 지니고 다녔는데 실수로 이를 성씨의 집안에 떨어뜨렸다. 이 편지를 발견하고 격분한 집안 청년 둘이 정씨를 납치했다. 정씨는 결국 이들 둘에게 맞아 죽었다.

역사는 비극과 희극으로 두 번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모바일 메신저와 손으로 쓴 편지란 차이만 있을 뿐 정씨의 짝사랑이 부른 비극은 올해 1월 일어난 최씨의 황당했던 사건과 맥락을 같이한다. 결국 시간이 지나도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호기심과 사랑, 증오, 시기, 질투 등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과거 짝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한번이라도 더 띄기 위해 괜히 주변을 서성거렸던 것이나 오늘날 관심있는 사람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좋아요’ 버튼을 남발하는 행동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