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권위 해체를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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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국회·사법 원성 커져가…권위 살아야 품격있는 공동체
조롱과 불신 방치하면 미래없어
박효종 < 서울대교수·정치학 >
조롱과 불신 방치하면 미래없어
박효종 < 서울대교수·정치학 >
셰익스피어의 작품 《리어왕》에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영국의 늙은 왕 리어가 자신의 딸들에게 권력을 이양하자 그들은 아버지를 구박하고, 급기야 폭풍우 속에 쫓아내 버린다.
영토와 실권을 건네주고 난 후 왕의 권위와 명예만을 보유한 상징적인 왕으로 전락한 리어는 두 딸로부터 자기가 기대하는 권위, 명예, 아버지로서 받을 존경마저 모두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충직한 신하 켄트에게만은 리어는 늙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무섭고 장대하며 여전히 뭇 인간들 중 왕이다.
폭풍우 속에서 정신이 나간 리어는 그를 끝까지 따라다니는 켄트에게 묻는다. “넌 나를 아느냐.” 켄트는 대답한다. “당신의 거동에는 제가 기꺼이 ‘주인님(master)’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자 리어는 다시 묻는다. “그게 무엇이냐.” 켄트는 대답한다. “그것은 권위(authority)입니다.”
분명 21세기 한국의 공동체는 왕과 신하의 ‘주종관계’가 아니라 자유인들의 ‘평등관계’가 특징이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그런 존재를 받들어 모시는 군신(君臣) 관계가 아니라 주인의식을 갖는 ‘시민들 사이의 관계’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평등관계에서도 시민들이 “캡틴, 캡틴, 우리 캡틴”이라고 할 수 있는 권위가 살아 있어야 품격있는 공동체가 된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 대통령의 얼굴을 보면서 “당신의 얼굴에는 제가 ‘대통령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판사를 보면서 “당신의 얼굴에는 제가 ‘판사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고 말하는 시민들이 있는가.
지금 한국 사회는 국가기관의 권위가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상황이다. 공동체의 질서와 지속가능성을 위해 국가권위를 행사해온 대통령, 행정부, 입법부 및 사법부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1987년 민주화를 통해 민의에 따라 뽑는 직선대통령제를 채택했으나,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선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권력이 비대해진 왕과 같은 대통령을 5년마다 뽑고 임기 말이 가까워지면 온갖 부정부패나 실정이 드러나 “대통령 욕을 자기집 강아지 욕보다 더 심하게” 한다.
심지어 “현 대통령을 찍은 손을 잘라버리겠다”는 아우성이 하늘을 찌르게 되며 대통령은 끝없이 사과해야 하는 악순환이 5년마다 반복된다.
헌법기관이면서도 존재감이 없는 국회는 어떤가. 여야로 갈려 당쟁을 멈출 줄 모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북한 인권법 등 모든 국가현안에서 사사건건 부딪치며 폭력을 밥먹듯이 행사하는 국회는 이번에 의석을 299석에서 300석으로 늘리기로 전격 결정했다. 대의에는 합의하지 못하고 소인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슴지 않고 야합하니 어떻게 국회의 권위가 서겠는가.
사법부에 대한 원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판사의 판결에 승복하는 사람이 없다. 재판을 받는 사람마다 그 결과를 보고 앙앙불락(怏怏不樂)이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감이 왜 이토록 커진 것인가. 영화 ‘부러진 화살’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부러진 화살’은 불신받는 사법부의 권위를 반영하는 것일 뿐, 한편의 영화 때문에 판사의 권위가 추락한 것은 아니다. 판사의 권위가 추락한 이후에 ‘부러진 화살’이 흥행에 성공한 ‘선후관계’일 뿐 ‘부러진 화살’ 때문에 판사의 권위가 실추한 것과 같은 ‘인과관계’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처럼 이성적 충고와 지시를 내리는 국가기관의 권위가 추락한 결과 한국사회는 진실이 아닌 ‘진실과 비슷한 허위’, 분노, 불신, 조롱 등이 그 권위의 빈자리를 메워 나가고 있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권위의 추락으로 분노나 불신이 소수의 비아냥거림을 넘어 공동체의 ‘메인스트림’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의 미래는 없다. 그렇다면 누가 국가 권위의 복원에 나설 것인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처럼 당위는 있으나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 이 상황에 비극의 핵심이 있다.
박효종 < 서울대교수·정치학 parkp@snu.ac.kr >
영토와 실권을 건네주고 난 후 왕의 권위와 명예만을 보유한 상징적인 왕으로 전락한 리어는 두 딸로부터 자기가 기대하는 권위, 명예, 아버지로서 받을 존경마저 모두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충직한 신하 켄트에게만은 리어는 늙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무섭고 장대하며 여전히 뭇 인간들 중 왕이다.
폭풍우 속에서 정신이 나간 리어는 그를 끝까지 따라다니는 켄트에게 묻는다. “넌 나를 아느냐.” 켄트는 대답한다. “당신의 거동에는 제가 기꺼이 ‘주인님(master)’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자 리어는 다시 묻는다. “그게 무엇이냐.” 켄트는 대답한다. “그것은 권위(authority)입니다.”
분명 21세기 한국의 공동체는 왕과 신하의 ‘주종관계’가 아니라 자유인들의 ‘평등관계’가 특징이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그런 존재를 받들어 모시는 군신(君臣) 관계가 아니라 주인의식을 갖는 ‘시민들 사이의 관계’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평등관계에서도 시민들이 “캡틴, 캡틴, 우리 캡틴”이라고 할 수 있는 권위가 살아 있어야 품격있는 공동체가 된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 대통령의 얼굴을 보면서 “당신의 얼굴에는 제가 ‘대통령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판사를 보면서 “당신의 얼굴에는 제가 ‘판사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고 말하는 시민들이 있는가.
지금 한국 사회는 국가기관의 권위가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상황이다. 공동체의 질서와 지속가능성을 위해 국가권위를 행사해온 대통령, 행정부, 입법부 및 사법부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1987년 민주화를 통해 민의에 따라 뽑는 직선대통령제를 채택했으나,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선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권력이 비대해진 왕과 같은 대통령을 5년마다 뽑고 임기 말이 가까워지면 온갖 부정부패나 실정이 드러나 “대통령 욕을 자기집 강아지 욕보다 더 심하게” 한다.
심지어 “현 대통령을 찍은 손을 잘라버리겠다”는 아우성이 하늘을 찌르게 되며 대통령은 끝없이 사과해야 하는 악순환이 5년마다 반복된다.
헌법기관이면서도 존재감이 없는 국회는 어떤가. 여야로 갈려 당쟁을 멈출 줄 모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북한 인권법 등 모든 국가현안에서 사사건건 부딪치며 폭력을 밥먹듯이 행사하는 국회는 이번에 의석을 299석에서 300석으로 늘리기로 전격 결정했다. 대의에는 합의하지 못하고 소인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슴지 않고 야합하니 어떻게 국회의 권위가 서겠는가.
사법부에 대한 원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판사의 판결에 승복하는 사람이 없다. 재판을 받는 사람마다 그 결과를 보고 앙앙불락(怏怏不樂)이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감이 왜 이토록 커진 것인가. 영화 ‘부러진 화살’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부러진 화살’은 불신받는 사법부의 권위를 반영하는 것일 뿐, 한편의 영화 때문에 판사의 권위가 추락한 것은 아니다. 판사의 권위가 추락한 이후에 ‘부러진 화살’이 흥행에 성공한 ‘선후관계’일 뿐 ‘부러진 화살’ 때문에 판사의 권위가 실추한 것과 같은 ‘인과관계’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처럼 이성적 충고와 지시를 내리는 국가기관의 권위가 추락한 결과 한국사회는 진실이 아닌 ‘진실과 비슷한 허위’, 분노, 불신, 조롱 등이 그 권위의 빈자리를 메워 나가고 있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권위의 추락으로 분노나 불신이 소수의 비아냥거림을 넘어 공동체의 ‘메인스트림’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의 미래는 없다. 그렇다면 누가 국가 권위의 복원에 나설 것인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처럼 당위는 있으나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 이 상황에 비극의 핵심이 있다.
박효종 < 서울대교수·정치학 parkp@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