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이미지는 우아함이다. 영국의 와인이노베이션이 개발한 ‘튤립(Tulip)’은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인스탄트 와인이지만 빅 히트를 쳤다. 와인을 야외나 공공 장소 등에서 마시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병은 크고 무겁고, 잔 역시 깨지기 쉬운 데다 와인 따개까지 챙겨야 한다. 하지만 튤립은 이 문제들을 해결했다.

튤립을 개발한 제임스 내시는 2009년 와인이노베이션을 설립하고, 런던 외곽의 레인즈 파크(Raynes Park)에 작은 가게를 차렸다. 소비자 반응은 뜨거웠다. 입소문을 타고 대형 마트에서도 판매하게 됐고 이제는 영국뿐 아니라 유럽, 호주에서도 인기 제품이 됐다. 설립 첫 해에 비해 두 번째 해는 매출이 28배나 커질 정도로 성장세도 폭발적이다.

소비자를 사로잡은 비결은 뭘까? 영국인들은 문화생활 지출의 3분의 1을 주류비로 쓸 정도로 술을 좋아한다. 공원이나 거리에서도 삼삼오오 모여 가볍게 맥주를 마신다. 하지만 왜 와인은 맥주처럼 안 될까? 튤립은 이 물음에서 출발했다. 와인을 플라스틱 와인 잔에 담아 마치 요거트처럼 잔을 덮고 있는 은박지만 벗기면 어디에서나 편리하게 마실 수 있는 신개념 와인을 선보였다.

그 다음 성공 비결은 숫자에 숨겨져 있다. 튤립 한 잔의 가격은 2.25파운드(약 4000원)로, 와인 1병을 살 때보다 용량 대비 가격이 비싸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딱 1잔만 먹었다’는 심리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불황 탓에 소비를 줄이고 싶은 소비자들의 심리와 잘 맞아 떨어졌다. 튤립의 용량에도 비밀이 있다.

7잔이 채워지는 소주병도 2명이 먹든, 3명이 먹든 1잔이 모자라 결국 1병을 더 시키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튤립 1잔은 187.5㎖. 일반 와인잔보다 약간 적은 양으로, 더 마시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조금 모자란 양으로 더 구입하게 만들고, 더 안 산다고 해도 절약했다는 심리적 만족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에게 우아한 와인을 손쉽게 제공하고 싶은 기업에도 튤립은 좋은 파트너가 됐다. 비행기, 호텔 객실, 콘서트홀에서도 와인을 즐기고 싶은 소비자는 많지만 번거로움 때문에 메뉴에서 아예 빠져 있거나, 설사 있더라도 와인을 일반 플라스틱 컵에 따라줘야 했다. 튤립이 등장하자 운송, 호텔, 이벤트 업체와 고객이 모두 만족할 수 있었다. 2010년 1만9000명이 모인 팝가수 로드 스튜어트 콘서트에서 튤립은 무려 1만4000잔이나 팔렸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튤립이 출시 이전 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혹평을 받았다는 것이다. 영국의 드래곤즈 댄(Dragon’s Den)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참가자가 사업 아이디어를 선보이며 원하는 투자금액과 그에 상응해 줄 수 있는 회사 지분을 제시한다. ‘드래곤’이라 불리는 성공한 투자자들은 사업 아이디어를 평가해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

제임스 내시가 튤립을 발표했을 때 드래곤들 모두가 형편 없는 아이디어라고 입을 모았다. 와인은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튤립을 사지 않을 거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제임스 내시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혹평받은 내용을 대폭 개선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당신의 눈부신 사업 아이디어가 한 번에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정말 뛰어난 아이디어라면 언제 어디서든 기회를 찾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패를 교훈 삼아 재도전하는 것이다.

조미나 < 상무 / 기민경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