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美 대선…워싱턴 싱크탱크들의 전쟁 시작됐다
"공짜로 이렇게 귀중한 지식을 얻을 데가 또 있나요. "

가을비가 내려 제법 쌀쌀한 지난 1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매사추세츠 애비뉴에 있는 브루킹스연구소의 포크 강당.200여명의 방청객이 중동 민주화시위의 교훈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 귀를 곧추세웠다. 세미나 후반 30분 동안에는 방청객들이 미국의 역할과 유럽의 재정지원 등에 관한 질문을 쏟아냈다. 미국 해군병원 내과의사 출신인 포플린씨는 "바로 옆자리에 미국과 팔레스타인 정부 관계자가 앉아 세미나의 주요 내용을 메모했다"고 전했다. 그는 "무료 세미나가 열릴 때마다 워싱턴의 브루킹스 등을 찾는다"며 "공짜로 귀한 지식을 주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워싱턴의 싱크탱크(think tank)들이 후끈거리고 있다. 두뇌집단인 싱크탱크들은 경제 외교 · 군사 사회문화 등의 국내외 정책 아젠다를 경쟁적으로 연구 · 개발 및 세일즈하면서 대선 후보들에게 어필한다. 차기 정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대선 캠프로서는 민감한 주제로 열리는 세미나에서 정책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참석한 일반인들을 상대로 여론 수렴도 할 수 있어 싱크탱크의 각종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웬만한 국가 싱크탱크들 저리 가라

내년 美 대선…워싱턴 싱크탱크들의 전쟁 시작됐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 세계 싱크탱크 수는 169개국 6480개.미국이 1816개로 1위며 중국이 425개로 2위다. 워싱턴엔 미국 전체 싱크탱크의 21%인 393개가 몰려 있어 국가별 순위 3위인 인도(292개)보다 많다.

워싱턴의 간판급 싱크탱크는 '빅6'로 불리는 브루킹스연구소,헤리티지재단,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미국기업연구소(AEI),케이토연구소 등이다. 이 가운데 1916년 설립된 브루킹스가 가장 오래됐다. 헤리티지재단은 1973년 세워졌다. 정치적 스펙트럼으로 따진다면 브루킹스가 진보적인 반면 헤리티지는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흔히 '브루킹스=민주당''헤리티지=공화당'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식이 존재한다. 우연이지만 매사추세츠 애비뉴 서쪽(왼쪽)에 브루킹스연구소가 반대쪽인 동쪽(오른쪽)에 헤리티지재단이 자리잡았다.

펜실베이니아대는 지난해 브루킹스를 세계 1위 싱크탱크로 꼽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도 브루킹스를 찾아 정책을 세일즈하고 오피니언 리더들로부터 귀동냥했다. PIIE와 AEI,케이토는 국내외 경제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국제경제 문제 연구분야에서 세계 1,2위를 다투는 PIIE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등을 초빙, 강연회를 가질 정도로 파워가 있다. 이 연구소는 흥미를 끌 만한 주요 인물의 연설과 강연 방청객들에게 뷔페식 무료 점심을 제공하는 마케팅으로 유명하다. CSIS는 외교군사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다.

◆내년 대선 겨냥한 정책개발 앞다퉈

내년 美 대선…워싱턴 싱크탱크들의 전쟁 시작됐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과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거액의 후원금을 낸 것으로 잘 알려진 헤리티지재단.이곳은 두 인물을 기리는 회의실을 각각 별도로 뒀다.

공화당 대선후보 가운데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대선용 외교안보정책 개발 작업을 헤리티지재단에 맡겼다. 닉 잔 아시아 · 태평양 미디어담당 연구원은 "헤리티지에서 외교안보 연구를 총괄하는 킴 홈즈 전 국무부 차관보가 지원에 나섰다"고 말했다. 피터 싱어 브루킹스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싱크탱크의 역할을 "이론적인 연구 세계와 정부의 정책을 연결해주는 자전거 체인과 같다"고 말했다. 실제 브루킹스는 세계 2차대전 후 유럽 재건을 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마셜플랜 입안을 도왔다.

헤리티지는 장기 호황의 토대를 쌓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두뇌집단 역할을 했다. 레이건은 1981년 집권하자마자 헤리티지가 작성한 1100쪽 분량의 리더십 연구서를 각료들에게 나눠줬다. 연구서는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이행하고자 했던 보수주의 가치를 제공한 지침서였다. 학계에서는 이 연구서에 담긴 2000가지 주문사항 중 약 60%가 결실을 봤다고 평가하고 있다.

◆돈과 인재가 몰리는 이유

미국 중앙은행(Fed)에서 벤 버냉키 의장 아래 부의장을 지낸 도널드 콘은 지난해 브루킹스로 자리를 옮겼다. 브루킹스에서는 그를 비롯해 200명 이상의 상근 연구원과 초빙 연구원이 활동 중이다. 한국의 전직 관료나 학자,정치인들도 브루킹스와 헤리티지의 초빙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다.

내년 美 대선…워싱턴 싱크탱크들의 전쟁 시작됐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백악관 비서실장 출신인 존 포데스타는 2003년 미국진보센터(CAP)를 백악관 인근에 세웠다. 당시 진보 진영에서 헤리티지재단에 맞설 싱크탱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는 오바마 정부의 정권인수팀까지 이끌었다.

왜 싱크탱크가 각광을 받을까.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재단은 당초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의 에이즈,말라리아,결핵과 싸우는 단체에 후원금을 집중 투입했다. 하지만 이후 브루킹스와 CSIS,글로벌개발센터(CGD)에 수백만~수천만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싱크탱크 주도의 정책 개발을 통한 영향력이 훨씬 크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워싱턴=김홍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