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산다는 것…내용이 궁금해서만은 아니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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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 스토리 - 2030 기자의 아날로그 이야기
전자책 덕분에 콘텐츠 구하기는 좋지만 종이책 '실물가치'까지 대체하진 못해
책은 산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
전자책 덕분에 콘텐츠 구하기는 좋지만 종이책 '실물가치'까지 대체하진 못해
책은 산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
"혹시 이 책 띠지는 없나요?"
2009년 이맘 때 인천 금곡동에 자리잡은 배다리 헌책방 골목을 찾은 적이 있다. 싼 값에 책을 사는 것은 물론 절판된 옛날 책도 찾을 수 있어 종종 찾는 곳이다. 여느 때처럼 단골 서점에서 책을 찾던 와중에 다른 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방에서 어떤 국내 소설가가 쓴 작품의 초판을 찾았는데 책 표지를 둘러싸는 '띠지'도 함께 구할 수 없느냐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책을 사자마자 띠지를 버리는 기자로선 당황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얼마 뒤 책 수집가로부터 띠지의 가치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띠지가 없으면 가치가 반으로 줄어들 정도라고 한다.
◆책의 가치는…의미 vs 존재
책은 미디어다. 기본적인 책의 역할은 텍스트 혹은 그림을 보관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잉크가 묻어 있는 종이 다발을 실로 묶은 '실체'를 가진 물리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책의 본질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를 담는다는 점에 있다.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는 '책들의 전쟁'이란 단편에서 "모든 책들 위에는 저자의 불안한 영혼이 떠돌고 있다"고 단언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역할이 책의 가장 큰 존재 이유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책이 처음부터 의미 전달의 역할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책은 인쇄소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산품이다. 하지만 금속활자 인쇄가 보편화하기 이전 시절에는 책 한 권을 만들려면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를 종이에 손으로 베껴 써야만 했다. 지난 9월 미국에서 중세시대와 동일한 채색 필사 방식으로 만들어진 성경이 공개됐는데 1998년 제작을 시작한 것으로 완성까지 13년이 걸렸다고 한다. 중세시대에도 성경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수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가격도 비쌀 수밖에 없었다. 성경 한 권의 가격이 수백만원에 달했다. 도서관에서는 도난 방지를 위해 성경을 쇠사슬로 묶어 놓을 정도였다.
책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되기도 했다. 당대의 명필이 한 글자씩 베껴 쓰고 페이지마다 삽화를 그려넣은 책은 당시에도 집 한 채 가격을 호가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책이라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책 속에 담긴 의미보다는 '존재 가치'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셈이다.
인류 문명이 생겨난 이래 책의 존재가 의미를 압도하던 시절이 이어졌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대로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1455년 금속활자 인쇄 기술을 만들어낸 이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소수만이 읽을 수 있었던 책이 인쇄술의 발달로 일반화하면서 사람들의 지식이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이 같은 흐름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의미가 존재를 넘어서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종이책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기자는 아마존이 만든 전자책 기기 '킨들'을 사용 중이다. 우리말로 쓰여진 콘텐츠를 구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주로 갖고 있는 책을 스캔해 pdf 파일로 만들어 읽는다. 아주 가끔씩(!)은 아마존 사이트에서 원서를 사다 읽기도 한다. 기기의 크기가 작을 뿐더러 여러 책을 넣어다닐 수 있어 휴대하는 데 따른 부담이 적다.
전자책은 순수하게 데이터만으로 이뤄진 파일을 읽어들여 보여주는 방식이다. 책이 갖고 있는 의미와 존재 가운데 온전히 의미만을 지닌 매체다. 미국처럼 콘텐츠 구입이 쉬운 곳에서는 빠른 속도로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 도입이 더디지만 장기적으로 전자책이 활성화할 것이라는 전망에 이견을 보이는 사람들은 없다.
2년 전 헌책방에서 기자가 샀던 책은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이었다. 정확히는 '문 팰리스'라는 책이다. 이 책이 처음 번역돼 나왔던 1997년에는 원제를 그대로 읽은 문 팰리스란 이름으로 나왔다. 기자는 이미 새로 나온 '달의 궁전'을 구입해 읽은 상태였다. 한번도 '문 팰리스'를 펼쳐본 적이 없다. 순전히 책 자체가 목적이었던 셈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은 책을 샀다는 것만으로 그 책이 자기 것이라고 착각한다"고 꼬집었지만 기자 같은 사람들이 남아 있는 한 종이책이 사라지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
2009년 이맘 때 인천 금곡동에 자리잡은 배다리 헌책방 골목을 찾은 적이 있다. 싼 값에 책을 사는 것은 물론 절판된 옛날 책도 찾을 수 있어 종종 찾는 곳이다. 여느 때처럼 단골 서점에서 책을 찾던 와중에 다른 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방에서 어떤 국내 소설가가 쓴 작품의 초판을 찾았는데 책 표지를 둘러싸는 '띠지'도 함께 구할 수 없느냐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책을 사자마자 띠지를 버리는 기자로선 당황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얼마 뒤 책 수집가로부터 띠지의 가치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띠지가 없으면 가치가 반으로 줄어들 정도라고 한다.
◆책의 가치는…의미 vs 존재
책은 미디어다. 기본적인 책의 역할은 텍스트 혹은 그림을 보관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잉크가 묻어 있는 종이 다발을 실로 묶은 '실체'를 가진 물리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책의 본질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를 담는다는 점에 있다.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는 '책들의 전쟁'이란 단편에서 "모든 책들 위에는 저자의 불안한 영혼이 떠돌고 있다"고 단언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역할이 책의 가장 큰 존재 이유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책이 처음부터 의미 전달의 역할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책은 인쇄소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산품이다. 하지만 금속활자 인쇄가 보편화하기 이전 시절에는 책 한 권을 만들려면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를 종이에 손으로 베껴 써야만 했다. 지난 9월 미국에서 중세시대와 동일한 채색 필사 방식으로 만들어진 성경이 공개됐는데 1998년 제작을 시작한 것으로 완성까지 13년이 걸렸다고 한다. 중세시대에도 성경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수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가격도 비쌀 수밖에 없었다. 성경 한 권의 가격이 수백만원에 달했다. 도서관에서는 도난 방지를 위해 성경을 쇠사슬로 묶어 놓을 정도였다.
책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되기도 했다. 당대의 명필이 한 글자씩 베껴 쓰고 페이지마다 삽화를 그려넣은 책은 당시에도 집 한 채 가격을 호가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책이라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책 속에 담긴 의미보다는 '존재 가치'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셈이다.
인류 문명이 생겨난 이래 책의 존재가 의미를 압도하던 시절이 이어졌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대로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1455년 금속활자 인쇄 기술을 만들어낸 이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소수만이 읽을 수 있었던 책이 인쇄술의 발달로 일반화하면서 사람들의 지식이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이 같은 흐름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의미가 존재를 넘어서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종이책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기자는 아마존이 만든 전자책 기기 '킨들'을 사용 중이다. 우리말로 쓰여진 콘텐츠를 구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주로 갖고 있는 책을 스캔해 pdf 파일로 만들어 읽는다. 아주 가끔씩(!)은 아마존 사이트에서 원서를 사다 읽기도 한다. 기기의 크기가 작을 뿐더러 여러 책을 넣어다닐 수 있어 휴대하는 데 따른 부담이 적다.
전자책은 순수하게 데이터만으로 이뤄진 파일을 읽어들여 보여주는 방식이다. 책이 갖고 있는 의미와 존재 가운데 온전히 의미만을 지닌 매체다. 미국처럼 콘텐츠 구입이 쉬운 곳에서는 빠른 속도로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 도입이 더디지만 장기적으로 전자책이 활성화할 것이라는 전망에 이견을 보이는 사람들은 없다.
2년 전 헌책방에서 기자가 샀던 책은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이었다. 정확히는 '문 팰리스'라는 책이다. 이 책이 처음 번역돼 나왔던 1997년에는 원제를 그대로 읽은 문 팰리스란 이름으로 나왔다. 기자는 이미 새로 나온 '달의 궁전'을 구입해 읽은 상태였다. 한번도 '문 팰리스'를 펼쳐본 적이 없다. 순전히 책 자체가 목적이었던 셈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은 책을 샀다는 것만으로 그 책이 자기 것이라고 착각한다"고 꼬집었지만 기자 같은 사람들이 남아 있는 한 종이책이 사라지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