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카드사 상품담당자 B씨는 최근 일할 맛이 뚝 떨어졌다. 오랫동안 분석한 소비 패턴을 바탕으로 지난 6월 의욕적으로 신상품을 기획해 금융감독원에 상품 심사를 신청했지만 아직까지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약관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상품들이 줄잡아 수백건에 이르러 대기표를 뽑아놓고 5개월째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트렌드에 맞춰 상품을 기획해도 시장에 내놓지 못하고 있어 답답하다"고 하소연했다.

새 금융상품 적체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은행 · 보험 · 카드사 등 금융업계가 쏟아내는 신상품들을 금감원이 제때 처리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금감원은 조직 개편 및 인력 이동 등에 따라 심사 여력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금감원이 내년 초 또 한 번의 조직 개편을 앞두고 있어 업계는 적체 문제가 더 심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상품 수백건씩 쌓여만 있어

카드 · 리스 · 할부금융사 등을 관리 · 감독하는 여신전문감독국에는 현재 150여건에 달하는 상품 약관 제정(변경) 신고서가 쌓여 있다. 여신전문회사는 상품에 대한 약관을 만든 후 금감원에 사전신고하도록 돼 있다.

금감원은 체크리스트 등을 활용해 소비자 권익 등의 내용을 심사한 후 결과를 통보한다. 심사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엔 금융위원회 및 공정거래위원회와 협의해 변경을 명령한다.

금감원 관계자는 "분기마다 200여건에 달하는 상품 신고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라고 말했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작년까지만 해도 신상품을 신고하면 2주 안에 심사가 끝났지만 올 들어서는 심사를 기다리는 데만 3개월 이상 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감독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9월에 들어온 것들이 지금 처리되고 있으니 최소 한 달 이상 걸리는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2~3주 정도면 끝나던 심사가 최근엔 최소 한 달반 이상으로 늘어났다"고 전했다. 보험사의 경우엔 상품 승인 신청에 대해 30일 내에 감독당국이 결정하도록 규정을 두고 있어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심사 인력 없다"

금감원은 상품 심사 기간이 늘어나고 있는 데 대해 "도저히 여력이 없다"며 볼멘소리다. 은행감독국은 통상 4명이 약관을 심사해왔지만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 등에 따라 3명으로 축소됐다. 여신전문감독국은 그동안 직원 혼자 심사를 맡아오다 그나마 최근 1명을 늘려 2명에 불과한 상황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은행의 경우 수수료 체계 및 여신관행 개선 등에 인력을 집중 배치할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카드사의 경우 최근 불거진 가맹점 수수료 인하 및 카드론 보이스피싱,카드사 간 과당경쟁 등에 대한 문제가 지적되면서 약관 심사에 투입할 인력이 모자란다는 게 금감원의 설명이다. 여기에 신규 카드 발급을 억제하려는 감독당국의 방침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부가서비스 등 상품 약관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 것도 심사기간이 길어지는 이유다. 그러나 금융소비자보호원 신설에 따라 내년 상반기에 또다시 조직 개편을 앞두고 있어 적체 현상은 더 심화될 것이란 지적이다.

◆"적기 놓쳐 손해"

금융업계는 금감원의 신상품에 대한 약관 심사가 너무 오래 걸려 상품 출시 적기를 놓치고 있다며 발만 구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새로운 상품으로 경쟁해야 하는 카드사들 입장에서는 가능한 한 심사가 빨리 끝나는 것이 좋다"며 "때를 맞춰 상품을 기획해 내놓으려고 해도 심사를 기다리다 출시 시기를 놓쳐 인기가 시들해지는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김일규/이상은/강동균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