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휘자 사이먼 래틀 3년만에 내한
베를린필,15~16일 말러·브루크너 연주
사이먼 래틀 "음악은 불치 바이러스…말러·브루크너 마지막 교향곡 연주"
“2010~11 시즌에 전 세계가 ‘말러리아(작곡가 말러 연주 열풍을 말라리아 전염병에 빗댄 말)’를 앓았죠.저도 그 중 한 사람이고요.말러는 저의 DNA와 뼛속에 흐르는 작곡가예요.정직하면서 열정적인 그의 음악이 저를 지휘자로 만들었으니까요.이번에 말러와 부르크너를 연주하는데,비슷한 시기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곡을 써내려간 두 작곡가의 레퍼토리로 한국 관객을 만날 수 있게 돼 행복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129년 전통의 베를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한국을 다시 찾았다.2008년 브람스 교향곡 전곡 연주로 전석 매진을 기록한 지 3년만이다.1984년 카라얀이 첫 내한한 이후 통산 네 번째.2002년부터 베를린필 수장을 맡고 있는 사이먼 래틀 상임지휘자(56)는 15일 “우리는 ‘한국 관객을 만나고 싶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한국을 찾는다.한국 관객이 보내주는 침묵의 깊이는 언제나 큰 울림과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그는 15일 저녁 말러 교향곡 9번(예술의전당)에 이어 16일 브루크너 교향곡 9번(세종문화회관)을 지휘한다.

1955년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난 래틀은 열한 살에 조지 허스트가 지휘하는 말러 교향곡 2번을 듣고 지휘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했다.1974년 존 플레이어 국제 지휘자 경연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고 1980년부터 버밍험시립교향악단 1지휘자로 활동하며 무명의 악단을 최고로 끌어올린 주인공이다.최근에는 2018년까지 베를린필 상임지휘자 계약이 연장되는 등 21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그의 연주회가 있는 날에는 밤늦게 런던행 특별 철도편이 연장 운행됐던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며 “단원들과 함께 점진적인 성과를 거둬왔다.레퍼토리도 확장해왔고,연주 방식도 섬세하게 발전시켜왔다.무엇보다 클래식 음악을 널리 퍼뜨리는 미션을 잘 수행해왔다”고 말했다.

사이먼 래틀은 ‘소통의 달인’으로 통한다.타악기 주자 출신인 그는 한 음악제에서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것에 개의치 않고 단원들 틈에 들어가 연주를 하는가 하면,2004년 일본 순회공연 중 호른 독주자가 악보를 분실한 것을 알고는 자신의 악보를 내준 뒤 자신은 암보로 지휘한 적도 있다.

2002년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후 독일 전통 레퍼토리와 근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아우르는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권위적이던 베를린필의 활동 영역도 확장시켰다.도이치뱅크로부터 후원 받는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뮤직아트,뮤직필름 앤 송스’,3년 전부터 온라인 공연 실황 중계시스템인 ‘디지털 콘서트홀’ 운영,영화와 다큐멘터리 음악 녹음,심야 콘서트를 여는 ‘레이트 나이트 콘서트’ 등이 그것.이번 내한 공연 중에도 공연 두 시간 전 음악에 재능이 있는 소외계층 어린이들을 초청해 오픈 리허설을 진행한다.

그는 “음악은 물,공기와 같다.한번 앓으면 못 고치는 불치의 바이러스다.많은 사람들이 좋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다.베를린필의 철학도 그것이다.비싼 악기를 들고 세계를 누비는데 어린이들은 이 악기를 직접 보고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큰 영감과 자극을 받는다”고 말했다.

래틀은 최근 경제위기 여파로 각국 오케스트라 예산이 삭감된 데 대해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 문화예술 분야가 첫 희생자가 되곤 한다.수년 동안 쌓아올린 공든 탑이 한 사람의 서명 하나로 순식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그러나 문화예술도 경제의 일부다.당장 금전적인 혜택을 주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엘 시스테마를 통해 17세 때 베를린필에 입단한 베네수엘라 출신 단원 에딕슨 루이스를 예로 들었다.

“그 단원은 ‘아홉 살 때까지는 나중에 커서 풍족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지가 걱정이었지만,지금은 내 손에 비올라가 있다.음악은 내 영혼의 음식이다’고 말합니다.어릴 때부터 음악의 감흥을 느끼게 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음악을 깊이 있게 즐기는 관객이 있는 한국에 다시 오게 돼 기쁘다.한국은 국가 규모에 비해 많은 음악 영재와 음악가를 배출한 핀란드와 같은 나라다.다음 달에 베를린에서 작곡가 진은숙 씨의 작품을 연주하는데 나중에 한국에서도 그의 곡을 꼭 연주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