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후원·기부…로스차일드는 '제2의 메디치' 였다
지난주에 이어 로스차일드 가문 얘기를 하나 더 해보자.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이디시어가 있다. 독일어와 히브리어의 혼성어인 이디시어로 후츠파(chutzpah)가 있다. 후츠파란 비타협,뻔뻔함,성깔 있음,완벽주의 등 다중의미를 지닌 이디시어다. 후츠파는 그리스어 휴브리스(hubris)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휴브리스는 비타협적이고 그 결과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 자만심을 말한다. 휴브리스는 그리스 신화와 비극의 주인공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덕목으로 아킬레스도 휴브리스 때문에 죽었다. 아놀드 토인비는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능력만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자신이 과거에 했던 방식대로 일을 밀어붙이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의 부질없는 오만을 '휴브리스 요인'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의 신화는 아직도 '휴브리스 요인'의 예외로 남아 있다. 과연 그 요인은 무엇일까.

로스차일드 전기 작가인 데릭 윌슨은 "로스차일드가는 '후츠파' 덕분에 번성했다"고 분석하면서 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로스차일드는 아우슈비츠의 공포가 한창일 때도 아이들을 미국으로 도피시키지 않았다. 당시 시오니즘운동의 대표인 차임 바이츠만(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은 밤새 독일군이 폭격을 퍼붓는 런던의 도체스터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옆에는 로스차일드가의 아이들이 울고 있었다.

바이츠만은 "다른 부유한 사람들처럼 왜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지 않았나요?"라고 로스차일드에게 물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그건 내 아이들이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오.만약 이 세 명을 미국으로 보낸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700만 유대인을 모두 겁쟁이로 부를 것이오!" 왕자처럼 살았던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 청년들이었지만 2차대전 때는 전장으로 달려갔다.

로스차일드의 문양에는 협력,완전,재능이 새겨져 있고 창업자의 5형제를 상징하는 5개의 화살이 있다. 이들은 늘 완전함을 추구했고 조금의 결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로스차일드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신비주의'를 더했다. 로스차일드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특별할 정도였다. 결혼 연회는 자신의 거대한 성이나 화려한 호텔이 아니라 파리 외곽의 외딴 와인 저장고에서 열었다. 런던과 파리에 있는 로스차일드은행과 파리의 로스차일드 본사에는 건물 외부에 명패조차 없다.

그러나 '후츠파'와 같은 오만으로는 성공신화를 지속할 수 없다. '사회와의 소통'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로스차일드는 메디치가 떠난 유럽의 문화후원자 역할을 했다.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을 후원하고 프랑스 발레와 이스라엘 예술가를 지원해 왔다. 로시니, 하이네,빅토르 위고,쇼팽,조르주 상드,오노레 드 발자크 등 문학과 음악의 거장들을 사귀었다.

경마 등 스포츠,동식물 탐험의 후원뿐만 아니라 미국 인디언의 교육을 위해 기부하고 고대 인도의 예술에 대한 연구를 지원해왔다. 지금도 런던 로스차일드은행에는 매월 기부할 대상을 작성하는 특별부서가 있다. 루브르박물관,대영박물관에는 로스차일드가의 도서관이나 응접실에 있던 물품이 기증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소리 소문 없이 이뤄진다. 결코 내색하지 않는다는 게 로스차일드 문화 후원의 불문율이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 · 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