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로 돈 몰리는데 굴릴 데가 없다
한 증권사 인수 · 합병(M&A) 담당 임원은 얼마 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아들이 기름때를 묻히기 싫다는 이유로 상속을 포기한 제조업체의 매각 자문을 맡았는데 오너가 돌연 매각을 취소해서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모펀드(PEF)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어 뒷거래로 가격을 올려놨던 것이다. 이 회사 회장은 가격이 올라가자 "좀 더 두고본 뒤 팔겠다"며 계약서에 사인하는걸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올해 주요 '메가 딜'엔 어김없이 PEF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달 초 입찰의향서(LOI)를 마감한 팬택 매각만 해도 KTB,하나대투증권이 출자한 PEF와 신한PEF 등 PEF 3곳만 의향서를 제출했다. 업계 관계자는 "일단 의향서를 제출하고 보자는 식"이라고 지적했다.

PEF로 돈이 몰리고 있지만 투자할 매물은 줄고 있다. '유동성 풍요 속 투자처 빈곤' 현상이다. 매물을 잡기 위한 PEF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격이 치솟거나 때론 더 좋은 값을 받으려고 매물이 사라지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돈은 넘치는데 매물이 없다

20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달 말까지 등록한 PEF는 177개에 달한다. 출자 약정액은 총 31조원이다. 다음달께 국민연금(9000억원) 정책금융공사(6000억원) 우정사업본부(4600억원)가 투자하기로 한 금액까지 합치면 11월 말까지 32조9000억원이 PEF로 들어갈 예정이다. 작년 한 해 약정액(26조6000억원)보다 23% 증가한 액수다.

업계 관계자는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전통적인 투자 자산의 매력이 떨어지면서 투자자들이 PEF 등 대체투자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형 PEF인 티스톤의 민유성 회장은 "PEF 숫자는 많은데 매물은 적은 전형적인 공급 과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PEF 시장의 '큰손'인 정책금융공사도 'PEF 공급 과잉' 현상을 감안해 지난해 1조5000억원이었던 투자 규모를 올해 6000억원으로 줄였다. 공사 관계자는 "투자 대상도 M&A보다는 시설자금을 필요로 하는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쪽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로 방향 돌려야

전문가들은 국내 시장의 매물이 적은 만큼 해외로 투자처를 다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내 PEF가 투자한 기업은 작년 말까지 총 263개사.이 중 해외 기업은 25개사로 10% 미만이다. 우리투자증권 관계자는 "대기업들도 국내 시장보다는 해외 투자를 선호하는 편"이라며 "현재 유럽에서 M&A를 몇 건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달러 강세 현상이 지속되면서 해외 매물을 사는 데 드는 투자비가 증가하고 있는 데다 국내 시중은행의 달러 공급 능력이 떨어져 돈을 빌려올 곳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PEF뿐만이 아니다. 국민연금의 경우 2008년 이후 해외 투자를 늘렸지만 전체 자산 323조원 가운데 33조원(작년 기준) 정도만 해외에 투자한 상태다. 총 9조원가량을 운용하는 사립학교교직원연금은 6138억원을,운용 규모 5조원 수준인 공무원연금은 400억원을 각각 해외 투자에 배정했다.

민간 자산운용사도 마찬가지다. 삼성자산운용은 33조3000억원의 운용액 가운데 지난 19일까지 해외에 투자한 돈이 1조7400억원에 불과했다.

KB자산운용은 21조2452억원 중 2조5031억원만 해외에 나가 있다. 민간 운용사 중에는 30조2488억원 가운데 11조1369억원을 투자한 미래에셋자산운용(7월 말 기준)의 해외 투자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