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인쇄물의 대명사는 일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게 패션화보집이나 도록(圖錄) 카탈로그 등이다. 그런데 일본 출판업체들이 이들 고급 인쇄물을 한국에서 수입해간다. 그것도 권당 30만원가량 되는 비싼 화보집이다. 서울 성수동의 삼성문화인쇄에서 이를 공급한다. 왜 최고급 인쇄의 자존심 일본 업체들이 한국에서 이를 찍어 가는 것일까.


2008년 봄.일본 출판업체 관계자 몇 명이 서울 성수동을 찾아왔다. 삼성문화인쇄(대표 조영승 · 78)의 인쇄기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방문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의 인쇄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세계 최고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국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떤 일본인이 한국에 왔다가 빼어난 인쇄물을 보고 수소문 끝에 이를 제작한 업체가 삼성문화인쇄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일본 출판업체들에 한번 가보라고 강력히 권유한 것이다.

'한국에 뭐 그리 대단한 업체가 있을까. ' 반신반의하며 성수동 신도리코 옆의 삼성문화인쇄를 찾은 일본 출판사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 첫째,이 회사의 인쇄소는 공장이 아니라 호텔이었다. 항온항습시설이 갖춰진 데다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청결했다. 보통 인쇄시설은 일본이건 한국이건 낡거나 지저분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회사는 완전히 달랐다.

둘째,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최신식 기계들을 갖추고 있었다. 대당 30억원이 넘는 오프셋기를 비롯해 고급 컴퓨터 인쇄기계들이 즐비했다. 주로 일본과 독일제 기계들이다. 셋째,숙련된 기술자들이었다. 평균 근속 연수가 20년이 넘는 베테랑들이 포진해 있다. 고급 인쇄는 첨단 설비와 숙련기술자,좋은 작업환경 등 3박자가 맞아야 한다. 이들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항공(JAL) 캘린더를 수십년 동안 이 회사가 인쇄해왔다는 설명을 들었다. 도요타자동차의 럭셔리 브랜드인 '렉서스'의 한국 내 브로슈어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종합상사의 한국 내 판촉물도 이 회사가 도맡아 인쇄해왔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 내에서 쓰는 인쇄물과 일본 내 제품과는 품질에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인쇄물을 하나씩 살펴봤다. 그런 뒤 결론을 내렸다. '일본 내 최고급 인쇄물과 품질이 동등하거나 더 낫다고.'그러면서 가격은 일본 것보다 저렴했다.

이들은 곧바로 주문했다. 이를 시작으로 일본 출판사인 알파는 '일본의 로고와 마크''월드 레스토랑 디자인',일보출판은 '패키지 디자인', 갭(GAP)은 '신부의상 컬렉션''남성복 컬렉션' 등 화보집을 삼성문화인쇄에서 찍어가고 있다. 이들 화보집은 일본 내 대형 서점에서 권당 20만~30만원대에 팔리는 고가 서적이다. 게다가 일본 인쇄업체 못지않게 신속하게 납품받을 수 있었다. 조영승 대표는 "일본 기업으로부터 지난 3년 동안 품질이나 납기 관계로 클레임을 제기받은 적이 한번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에는 러시아 바이어들도 종종 찾아온다. 하바로프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 등 극동지역 기업인이나 정부 관계자들이다. 이들은 제품 카탈로그나 관공서 안내책자 등을 이곳에서 인쇄해간다. 이같이 이 회사에서 해외로 수출하는 인쇄물은 연간 100만달러어치가 넘는다. 뿐만 아니라 국내 굴지의 대기업 여러 곳도 이곳에서 해외에 내보낼 종합 카탈로그를 찍는다.

삼성문화인쇄는 규모가 큰 업체는 아니다. 종업원도 50명 수준이다. 하지만 이 회사는 고급 인쇄물에 특화돼 있다. 인쇄물 중 가장 까다로운 분야다.

어떻게 이 회사는 고급 인쇄물에 특화할 수 있었을까. 개성 출신인 조 대표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그는 군대를 두 번 갔다왔다. 6 · 25전쟁 때 강제 징집당했고 그 뒤 대학생시절 정식으로 군복무했다. 6 · 25전쟁 때는 강원도 인제 전투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겼고 친형을 이 전투에서 잃었다. 충북 영동전투에서도 수없이 위험한 고비를 맞았다.

전쟁 후 서울 을지로에서 중고 등사기 한 대로 학비를 벌기 위해 창업했다. 이때가 1956년.그로부터 55년 동안 인쇄 외길을 걸었다. 인쇄 인생 역시 험난하긴 마찬가지였다.

"3 · 15 부정선거를 폭로하는 인쇄물도 찍었는데 당시로선 목숨을 건 작업이었다"고 조 대표는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쇄 관계로 많은 고위 인사들과 교우했으나 한번도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오로지 인쇄에만 전념했다. "한번은 정부의 보안기관 관계자들이 찾아와 깜짝 놀랐지요. " 이들은 이 회사의 인쇄기술을 점검한 뒤 능력이 뛰어나다고 판단해 대통령 사진을 이곳에서 독점 인쇄해가기도 했다. 고급 인쇄를 하면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이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고 대량 인쇄시설을 확충할 때 그는 인쇄 품질 향상에 매진했다. 고집스럽게 이를 추구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3무(無) 원칙'을 세웠다. 교제비 · 리스 · 정년이 없다. 인쇄는 영업을 통해 수주하는 산업이다. 하지만 그는 일절 교제비를 쓰지 않는다. 영업부가 있지만 이들은 밖으로 뛰지 않는다. 찾아오는 고객을 상대로 상담할 뿐이다. 바이어는 구내식당에서 직원들이 먹는 메뉴로 대접한다.

리스도 없다. 인쇄 설비는 비싸다. 대당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에 이른다. 대다수 중소기업은 리스로 설비를 갖춘다. 조 대표는 그러다 보면 "불황 때 버텨낼 수 없다"며 "번 돈으로 투자한다는 원칙으로 사업을 해와 리스를 전혀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 대표의 검소한 생활은 인쇄업계에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가용이 없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전철로 출퇴근한다. 티슈를 한번 쓴 뒤 버리지 않고 책상 옆에 나뒀다 먼지를 닦거나 물기를 닦는 등 두 번 더 쓴다. 본사 1층 로비에 있는 멋진 분수대는 직원들과 함께 돌을 주워다 만든 것이다. 벽에 걸린 아름다운 그림은 고물상에서 구했다.

정년도 없다. 이 회사에는 창업 초기부터 함께 근무해온 직원이 여럿 있다. 76세인 한 직원은 이 회사에서 50년째 일하고 있다. 평균 근속 연수가 20년이 넘는다. 건강만 허락하면 100세까지도 일할 수 있다. 이게 기술 축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 대표는 일본을 자주 찾는다. 전시회도 가보고 일본 인쇄업체나 기계업체도 찾는다. 그곳에서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첨단 설비가 나오면 돈을 모았다가 이를 사온다. 그는 "인쇄는 결국 첨단 설비 싸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55년째 인쇄 외길을 걸은 그에게 아쉬운 게 하나 있다. 몇몇 국내 기업들이 일본의 뛰어난 인쇄술에 매료돼 고급 인쇄를 비싸게 일본에 주문하는 것이다. "일본 업체들이 최고급 인쇄물을 우리 회사에서 찍어 가는 것을 감안하면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이를 소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생활신조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와 '남을 배려하자'이다. 그래서 남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키지만 동시에 남들도 그렇게 행동해주길 원한다. 전철에서 젊은이들이 큰소리로 통화하거나 떠들 때 야단을 치는 어른을 요즘 찾아보기 힘들다.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야단을 치는 할아버지가 있다면 바로 조 대표일지도 모른다. 최소한 이런 예절은 지켜야 이 나라가 비로소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선진국의 기준은 두 가지다. 남에 대한 예절을 잘 지키는지,그리고 그 나라의 인쇄 수준이 어떤지로 판가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제품 카탈로그나 관광안내서 등 인쇄물은 그 나라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쇄를 포함한 많은 분야에서 저가 경쟁만 요구하는 한국 사회는 과연 선진국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 조 대표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