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제부처 장관은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들이 한 공기업 대졸공채 시험에 원서를 넣었는데,면접까지 올라가면 그쪽의 아는 사람에게 말을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일단 '챙겨보겠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대신 시간이 좀 지나면 '알아봤는데 쉽지 않았다. 정말 미안하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낼 생각이다.

지연과 학연으로 끈끈하게 얽혀 있고,인정(人情)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선 정부와 민간을 막론하고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각종 청탁과 민원에 시달리게 된다. 조금씩 서로 신세를 지고 살아온 터라 매몰차게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의 고위직들에 청탁과 민원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거절의 기술'이 필요한 이유다. 최근 잇따라 불거지고 있는 권력형 비리도 어찌 보면 이런 기술이 부족해 과거의 인연에 얽매였고,결국엔 '파멸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위 인사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거절의 기술'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빈번한 일은 아니지만,정치인을 만난 자리에서 인사 청탁을 해오면 그 사람 면전에서 담당 국장이나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훌륭한 인재를 추천하셨으니 적극적으로 검토해보라'고 바로 지시했다"고 말했다.

일단 그 자리에선 웃는 낯으로 헤어진 다음 다시 담당 국 · 과장에게 "아까 그 부탁 잘 알지? 들어주면 안돼"라며 호통을 쳤다는 것.국 · 과장들은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은 터라 장관의 '호통'이 '신경을 쓸 필요 없다'는 의미라는 걸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알겠다. 챙겨보겠다"고 하고 깔아뭉개는 방법도 많은 고위직들이 선호하는 '거절의 기술'이다. 청탁을 해온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거나,힘이 있는 곳에서 근무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

또 다른 부처의 장관은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아랫사람에게 부탁을 들어주라고 배짱 있게 얘기할 수 있겠느냐"며 "콜백을 해주지 않으면 그쪽에서도 다시 내게 전화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테니까,그냥 깔아뭉개는 게 상책"이라고 전했다.

'단도리' 성격이 강한 청탁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한 장관은 "비즈니스와 관련된 부탁은 거의 인 · 허가나 담당자를 소개해달라는 내용인데,상당수는 원래부터 문제없이 처리되는 사안들"이라며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부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감사의 전화'가 오기도 한다. 한 차관급 인사는 민원을 처리하지도 않고 잊고 지냈는데 "도와줘서 고맙다. 언제 식사 한번 모시겠다"는 전화가 온 적이 몇 차례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그때는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당황스럽다"고 했다.

마냥 깔아뭉개서는 후환이 두렵다는 게 고위직들의 솔직한 토로다. 일부 고위 인사들은 "부탁을 성사시키기 어려울 때는 전화를 걸어 안되는 이유와 사정을 충분히 설명한다"며 "그러면 상대편도 대체로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말했다.

사회 전반의 투명성이 높아지고,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과거처럼 청탁과 부탁이 쉽게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한 고위 공무원은 "예전처럼 인정에 이끌려 들어주기 시작하면 나중에 더 큰 유혹이 찾아온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고 조언했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