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헨 차이츠 푸마 이사회 의장 "폭스바겐보다 포르쉐 돼라"
‘총알 탄 사나이’ 우사인 볼트, ‘불굴의 사자’ 카메룬 축구국가 대표팀, 테니스계의 ‘흑진주’ 세레나와 비너스 윌리엄스. 이들은 모두 흑인이다. 흑인이라는 점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은 무명시절 한 스포츠용품 회사의 후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회사는 막강한 자본력을 자랑하는 스포츠용품 업계 거인인 나이키나 아디다스가 아니었다. 푸마였다.

볼트는 “16세 때부터 함께 일했다. 내가 무명일 때도, 부상했을 때도 도와줬다”며 “정말 좋은 파트너”라고 푸마를 평가했다. 푸마는 무명 선수들의 어려움을 함께하며 미래 스타를 키워냈다. 이 회사의 역사도 비슷했다. 한때 한물간 상품과 1억달러의 부채에 짓눌려 파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변신을 거듭하며 스포츠웨어 업계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트렌드 세터’로 변신했다. 변화를 이끈 주인공은 29세에 푸마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라 18년간 회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꿔놓은 요헨 차이츠다.

◆‘갓난아기 CEO’의 모험

독일 경제 일간지 한델스블라트는 최근 “글로벌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종합 스포츠용품업체 푸마가 아시아는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리셔스, 스와질란드 등의 생산시설을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글로벌 패션업계가 불황에 몸을 사리고 있지만 푸마는 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푸마가 이처럼 공격 경영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요헨 차이츠 푸마 이사회 의장이다. 그는 올초 프란츠 코흐에게 푸마 CEO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18년간 푸마를 진두지휘했다. 지금도 경영 세부사항까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90년 푸마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증권가에 푸마에 투자하라고 권유하는 애널리스트는 없었다. 8년 연속 적자행진에, 빚은 1억달러에 달했다. 푸마의 제품은 선수들은 물론 젊은이들로부터 무시당했다. 창고에는 싸구려 슬리퍼 100만켤레가 재고로 쌓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29세의 ‘애송이’가 푸마의 CEO 자리를 맡았다. 푸마는 여러 명의 CEO를 갈아치운 뒤 마케팅에서 두각을 나타낸 차이츠를 발탁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독일 일간 디벨트는 ‘갓난아기 CEO’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차이츠는 이런 평가에 개의치 않고 대수술을 시작했다. 우선 중구난방이었던 푸마의 로고를 통일했다. 당시 푸마는 부서마다 마음내키는 대로 엠블럼을 수정해 사용했다. 일치된 기업 이미지가 없었다. 브랜드 로열티를 확보할 수 없는 이유였다. 차이츠는 상품 진열대부터 액자까지 매장 내 모든 요소를 ‘푸마스럽게’ 바꿨다. 젊은층이 제품의 기능이나 완성도가 아니라 브랜드를 보고 신발이나 운동복을 구입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구조조정도 병행했다. 인력을 거의 절반가량 줄였다. 창고 8개 중 6개를 폐쇄했다. 몸값 비싼 모델 대신 아름다운 경관을 회사 홍보에 이용했다.

그 결과 푸마는 1994년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 성장을 거듭했다. 지난해에는 매출 27억유로에 영업이익 3억6000만유로를 기록한 알짜회사로 변신했다. 덩치는 나이키(190억달러), 아디다스(119억유로)에 뒤지지만 시장 인지도나 평판 면에서는 어깨를 겨룰 만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004년 차이츠를 ‘올해의 경영전략가’로 선정했다.

◆“폭스바겐보다 포르쉐가 돼라”

차이츠의 핵심 전략은 푸마 브랜드를 리포지셔닝(repositioning)한 것이다. 덩치 싸움으론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절대로 앞서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 뒤 수립한 전략이다. 차이츠는 이들과의 무의미한 경쟁을 금지했다. 그리고 “폭스바겐보다 포르쉐가 돼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덩치는 작더라도 고급 브랜드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었다. 골리앗과 싸운 다윗의 이미지를 차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전략에 따라 리포지셔닝을 위해 광고비를 아낌없이 투입했다. 다른 스포츠용품 업체들은 매출의 5%가량을 광고비로 쓰는 데 비해 푸마는 구조조정 직후부터 광고에 매출의 8%를 쏟아부었다. 차이츠는 “오늘은 이 브랜드, 내일은 저 브랜드가 선택되는 시대”라며 젊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스트리트 사커 컵’을 시행하는 등 저비용 고효율 마케팅 전략도 병행했다.

대규모 구조조정과 리포지션은 경쟁사를 따라가기 위한 체력을 갖추자는 방어적 전략이었다. 푸마는 체력을 보강한 뒤 여성용 스포츠용품 시장 개척에 나섰다. 공격적 승부수를 던진 것.

차이츠는 1998년 패션 슈즈를 생산하기 위해 톱 디자이너 질 샌더를 영입했다. 푸마 라벨이 붙은 ‘질 샌더 부츠’를 개발했다. 2000년대 들어선 비비안 웨스트우드, 미하라 야스히로, 필립 스탁, 알렉산더 맥퀸 등 유명 디자이너들과 손잡고 브랜드 이미지를 바꿔나갔다. 키워드는 ‘여성’이었다. 그 결과 “프라다 패션과 잘 어울리는 브랜드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은 “푸마는 여성을 발견했고, ‘페미닌(여성) 스포츠’ 사업이 엄청난 수익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고 평가했다. 고급 여성 제품 비중이 늘면서 기업 이미지도 명품, 여성적 이미지로 변해갔다.

고급 제품 전용 매장도 늘려갔다. 저가 제품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독일 내 대형 백화점 체인이었던 카르슈타트와 미국의 스포츠용품 전문 체인 풋라커에 공급을 줄이기도 했다. 대신 샌프란시스코와 도쿄, 파리, 뉴욕에 푸마 전문매장 ‘컨셉트 스토어’를 열었다. 런던의 해러즈와 함부르크의 토마스풍크트, 뉴욕의 헨리벤델 같은 고급 백화점에도 적극 진출했다.

◆스와힐리어까지 능통한 ‘코스모폴리탄 CEO’

차이츠는 유럽비즈니스스쿨(EBS)에서 마케팅과 금융을 전공했다. 이후 도이체방크, 바스프, 메르세데스 벤츠, 치약업체 콜게이트 등에서 근무했다. 차이츠는 이들 회사에서 미국과 브라질 등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시장을 경험했다. 벤츠 캘리포니아 법인에서 인턴 시절 마돈나에게 차를 파는 영업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는 브랜드 포지셔닝과 새로운 시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차이츠는 또 영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는 물론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도 유창하게 구사한다. 언어능력을 무기로 각 지역 대형 스포츠 구단 관계자와 국제 체육기구 등을 직접 개척했다. 상대방의 모국어로 직접 협상한 것이다.

차이츠는 직원들과의 소통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가 “손이 세 개가 아닌 것이 아쉽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전 세계 직원과 이메일 소통을 하는데 두 손으로는 부족하는 얘기였다. 시차를 고려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각 지점과 의견을 나눈다. 독일 헤르초겐아우라흐 본사는 물론 미국 보스턴, 홍콩 지사 직원 3200여명과 소통하고 대부분 해당국 언어로 메일을 주고받는다. 출·퇴근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이용해 이메일로 직원들의 주요 질문을 처리한다.

한델스블라트는 “푸마는 최근 자사 디자이너들에게 세계 각지로 여행하며 시장 흐름을 파악하도록 권장했다”며 “경영진과 직원 간 활발한 의견교환이 경쟁력 유지의 비결”이라고 진단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