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월 일본 오사카 이케다시의 한 선술집.일본 중소 식품업체 닛신(日淸)식품의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사장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회사를 세운 지 10년이 됐는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자괴감이 그를 짓눌렀다. "사탕 과자나 만들 바에는 모든 걸 때려치우는 게 낫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더 이상 살아가는 의미도 없었다. 선택은 자살이었다.

안도 사장은 마지막 잔을 비우고 힘없이 계산대로 향했다. 주방 옆을 지나던 순간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밀가루 반죽을 묻힌 생선이 끓는 기름에 튀겨져 나오고 있었다. 기름이 빠져도 원형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국수를 기름에 튀긴 뒤 건조하는 방법을 왜 생각 못했던가. " 뜨거운 물을 부으면 원래 상태로 풀어질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세계인의 식생활에 큰 변화를 준 인스턴트 라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닛신은 봉지라면 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라면을 기초로 세계적 식품업체로 성장했다.

◆"첫번째는 항상 자랑스럽다"

닛신은 세계 최초로 인스턴트 봉지 라면을 개발한 데 이어 1971년 컵라면 개발에 성공했다. 안도 전 닛신 회장에게 '라면의 아버지'란 별칭이 붙은 것도 이때였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식량난에 허덕이던 당시 일본 국민에게 닛신의 인스턴트 라면은 '서민 식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첫번째'에 대한 안도의 집념과 '불가능에 도전해 돌파하라'는 닛신의 문화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경쟁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1970~80년대 닛신의 라면이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리자 동종 업체들은 잇따라 라면 개발에 착수,수많은 인스턴트 라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본 식품업계에 '라면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게임기로 유명한 닌텐도의 자회사 산킨(三近)식품과 당시 최대 식품업체 마쓰다(松田)식품,메이세이(明星) 등 쟁쟁한 경쟁 업체들이 인스턴트 라면을 출시했다. 닛신의 시장 점유율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도 전 회장이 "이대론 안 되겠다"며 결정을 내린 것은 이맘때였다. 그는 임원 몇 명을 데리고 비밀리에 전국 여행을 떠났다. 라면 전문점 순례에 나선 것이다. 북쪽의 홋카이도부터 최남단의 오키나와까지 안도 전 회장은 전국의 유명 라면집이란 라면집은 전부 돌며 재료와 솜씨 등 맛의 비법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여기서 얻은 정보는 신제품 개발 기초가 됐다. 닛신은 얼마 뒤 전 지역의 맛을 담은 라면 신제품 300종을 한꺼번에 출시했다. 안도 전 회장은 "당시 전국의 유명 라면집을 순례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닛신은 없다"고 회고했다.

◆불황에도 매출 증가

지난해 말 일본 인스턴트 라면시장에서 닛신은 점유율 49.5%를 기록했다. 부동의 1위다. 2010회계연도(2010년 4월~2011월 3월) 실적을 통해 높은 경쟁력을 보여줬다. 영업이익이 345억엔으로 전년(273억엔)에 비해 26.3% 증가했다. 경기 침체로 매출 감소에 허덕인 경쟁사들과는 다른 성적표다. 닛케이비즈니스는 "상반기(1~6월)에도 대지진으로 인해 산업계 전반이 매출 감소 등을 겪고 있지만 닛신의 실적은 계속 개선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불경기를 이겨낸 성장은 해외 라면시장으로 눈을 돌린 덕분이다. 닛신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엔고와 원자재가격 상승 등으로 경영환경이 악화되자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닛신 측은 "지난해 해외 시장에서 인스턴트 라면이 582억엔어치 팔렸다"며 "전년보다 약 10%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닛케이비즈니스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세계 인스턴트 라면 소비량은 970억여개이며,매년 평균 10%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 인스턴트 라면업체들은 전 세계 50개국에 연간 8120만개의 인스턴트 라면을 수출하고 있다. 이 중 가장 많은 물량을 닛신이 공급한다.

◆제휴 통한 해외 진출 가속화

닛신은 미국과 유럽은 물론 최근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신흥시장으로 판로를 확대하고 있다. 세계라면협회(WINA)에 따르면 2009년 말 기준으로 국가별 라면 소비량은 중국 408억개,인도네시아 139억개,일본 53억개,베트남 43억개 등이었다. 비싸지 않으면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라면이 신흥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닛신은 성장하는 해외시장을 겨냥해 최근 중국 2위 라면업체 진마이랑(今麥郞)식품유한공사와 합작을 통해 새로운 상품 개발에 나섰다. 농심이 신라면의 매운 맛을 앞세워 중국에서 판매를 늘려가고 있는 것에 맞서 중국인이 선호하는 돼지 뼈를 우려내 만든 구수한 국물로 승부하겠다는 전략이다.

또 한 봉지에 3.5~3.6위안인 인스턴트 라면의 가격을 낮추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닛신 관계자는 "중국 최대 라면업체인 캉스푸(康師傅)와 한국의 농심 등 강력한 라이벌을 이길 수 있도록 저가의 고품질 라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닛신은 베트남에선 45년 전통의 식품업체 비퐁(Vifon)과 손잡고 제품 개발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 인스턴트 라면의 특징은 면이 가늘고 담백하다는 점에 착안,이와 비슷한 라면을 팔고 있다.

닛신은 2011회계연도 매출 목표를 4100억엔으로 정했다. 해외시장에서의 매출은 지난해보다 10% 늘려 잡았다. 닛신 관계자는 "일본 라면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라며 "매출을 늘리기 위해선 해외 각국의 차별화된 맛을 제품에 녹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장성호 기자 ja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