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88년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프로농구팀인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를 6500만달러에 사들였다. 현재 미식축구팀 시애틀 시호크스와 축구구단 시애틀 사운더스 FC도 거느리고 있는 그는 그해 미국 3대 프로스포츠 사상 최연소 구단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5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드림웍스에 단일 투자로는 사상 최대인 5억달러를 투자하며 영화계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급기야 2004년 최초의 민간 우주선 스페이스십 1호를 우주 공간에 띄워 올렸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도와 나사(NASA)의 외계지적생명체탐사(SETI) 프로그램에 거액을 지원했고,창의성의 원천인 두뇌지도를 연구하는 데도 기여했다.

'21세기형 르네상스맨'으로 불리는 폴 앨런(53) 이야기다. 20대 말 혈액암의 일종인 '호지킨 림프종'을 극복한 뒤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그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업가이자 자선가로 이름 높다. 포브스 선정 2010년 세계 부자 순위 37위의 억만장자이기도 하다. 그보다 더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그가 하나의 산업을 창출한 사람이란 점이다. 그는 1975년 빌 게이츠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MS)를 창업하며 PC시대를 연 주인공이다. 그의 회고록 《아이디어맨》에 MS 창업사와 인생 2막 스토리가 실려 있다.

시애틀의 사립 레이크사이드중 · 고등학교 동창인 앨런과 게이츠는 두 살 차이였지만 죽이 잘 맞는 사이였다. 둘 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고,프로그램 제작에 관심이 많았다. 앨런은 게이츠와의 협업 관계에서 자신은 무(無)에서 출발해 밑그림을 그리는 아이디어맨 역할을 했으며,게이츠는 경영자로서 그 아이디어를 들어주고 현실적으로 판단해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다고 정의했다.

앨런의 아이디어는 늘 시대를 앞서갔다. 인텔이 8008보다 업그레이드된 8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8080을 내놨을 때 이를 기반으로 한 컴퓨터 개발을 구상하기도 했다. 수백개의 칩을 연결해 현재의 미니컴퓨터보다 더 싸면서도 강력한 컴퓨터를 만들면 IBM을 능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게이츠는 현실적이었다. "인력과 돈이 너무 많이 든다"거나 "너무 복잡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 구상들을 '뭉개버렸다'.

1974년 MITS사의 에드 로버츠가 발명한 최초의 PC 알테어8800을 돌릴 베이식을 개발한 두 사람은 MS를 공동 창업했다. 회사 이름으로 '앨런 앤드 게이츠'를 고려했는데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소프트웨어를 합한 마이크로소프트로 정했다. 앨런은 50 대 50의 수익 배분을 생각했는데 게이츠는 60 대 40으로 자신이 더 많이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해 충격을 받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수입 분배 문제는 두 사람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갈등 요인이었던 것 같다. 1977년 사무실을 확장 이전했을 때도 게이츠는 64 대 36으로 수정 제의했다는 것이다. 앨런은 "(게이츠는)어떤 합의든 서명과 봉인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재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며 "그 범위에서 늘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대치까지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앨런의 아이디어만큼은 여전했다. "PC가 곧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기기가 될 것"이라거나 "(요즘의 인터넷처럼)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긴밀히 연결되는 컴퓨터 중심 사회가 될 것"이란 생각을 쏟아냈다.

1979년 MS의 베이식 해석프로그램 판매액이 마이크로프로세서 소프트웨어 제품으로 사상 첫 100만달러를 돌파했다. 앨런은 이후 16비트 프로세서용 베이식 개발에 나섰고,애플컴퓨터에도 호환할 수 있게 함으로써 MS의 폭발적인 성공을 견인했다. 이때도 게이츠는 "다시는 얘기를 꺼내지 말라"며 수익률 배분 논의를 일축했다. 앨런은 이때 울분을 삼키며 언젠가 게이츠와 헤어질 것을 결심했다고 털어놓았다. 앨런은 게이츠가 스티브 발머를 영입할 때 자신도 모르게 합의한 것보다 높은 지분율을 제시한 것에도 마음이 상했다고 고백했다.

소프트웨어를 통한 MS의 컴퓨터 시장 장악은 1981년 MS-DOS를 채택한 IBM PC가 나오면서 확고해졌다. IBM이 PC의 표준이 되고,MS-DOS가 그 운영체제가 되면서 MS로서는 돈을 찍어내는 권한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둘의 결별을 확실히 했던 사건은 1982년 12월 돌출됐다. 게이츠와 발머가 옵션을 발행해 앨런의 지분을 줄이는 방법을 논의하는 현장을 들킨 것이다.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종으로 방사선 치료 중이던 앨런은 1983년 2월 MS를 공식 사직했다. 때로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고 결국은 마음이 상해 갈라섰지만 사업 파트너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마음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우리는 혼자였을 때보다 함께했을 때가 더 성공적이었다. 나는 시장경쟁에 대한 빌의 놀라운 집중력,내가 실현 가능한 것에서 너무 떨어지지 않도록 견제하며 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던 그의 능력이 그리웠다. "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