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눈을 뜨니 새들이 먼저 지지배배 인사를 건넨다. 휴대전화의 알람 소리를 듣지 않고도 눈이 번쩍 떠지는 게 신통하다. 습관처럼 실내에서 화장실을 찾다가 '아차,내 집이 아니지' 하는 생각에 멈춰선다. 잠을 몇 시간 자지 않았는데도 기분이 상쾌하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안동 하회마을의 '화경당 북촌댁'에서 하룻밤을 묵은 소감이다.

하회마을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을 북촌,왼쪽을 남촌이라고 한다. 하회마을을 찾는 이들은 대개 북촌의 경치와 집을 둘러본다. 마을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 건너편에는 높이 64m의 부용대가 우뚝하다.

북촌댁은 이 북촌의 중심이다. 안채와 큰사랑(북촌유거),중사랑(화경당),작은사랑(수신와) 등 72칸에 이르는 집의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1797년 류사춘이 처음 건물을 짓고 그의 증손자 류도성이 1862년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한 지 150년이 지났어도 옛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어서다.

큰 계단을 오르듯 다리를 높이 들어야 넘어설 수 있는 중문의 문지방,아직도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을 짓고 방을 덥히는 아궁이,안채와 중사랑 · 작은사랑이 ㅁ자형으로 배치된 구조 등이 반가의 옛 살림을 짐작케 한다.

류도성으로부터 시작된 적선(積善)의 전통도 감동적이다. 경상도사를 역임한 류도성은 3년 동안 갈무리해둔 춘양목을 마침 홍수로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강물에 밀어넣었다. 북촌댁 사람들은 작은사랑에 '수신와(須愼窩)'라는 편액을 걸어두고 후손들의 교만을 경계했다. '수신와'란 모름지기 움집에 사는 듯이 삼가라는 뜻.번듯한 기와집에 산다고 교만하지 말고 어렵게 사는 이웃을 생각해서 언제나 삼가고 자신을 낮추라는 얘기였다. 남들이 생산량의 6~7할을 소작료로 걷을 때 4~5할만 받았다. 구한말엔 독립운동에 많은 재산을 내놓고 몸소 투신했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아침 산책에 나섰다. 고샅길을 걷노라니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후각을 기분 좋게 자극한다. 이 집에선 고등어를 굽고,다음 집에선 감자채를 볶는 모양이다. 옆집 부엌에서 무슨 반찬을 만드는지 짐작할 수 있었던 그 옛날엔 얼마나 인정이 넘쳤던가.

고샅길이 끝나자 강과 마을 사이에 쌓은 둑길이 나온다. 둑길을 따라 걸어도 좋겠지만 강쪽으로 내려서서 나룻배를 탄다. 건너편 백사장에 내려 계단을 올라가니 서애 류성룡이 선조 19년(1586)에 지은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서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서애는 이곳에 머물면서 《징비록》(국보 제132호)을 썼다. 옥연정사 마당을 가로질러 화천서원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부용대다. 절벽의 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니 하회마을과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책을 마치고 북촌댁으로 돌아오니 안채 대청마루에 아침상이 차려졌다. 두 사람씩 겸상인데 음식은 모두 놋그릇에 담았다. 인근 방앗간에서 갓 찧은 쌀로 지은 밥과 국,안동고등어구이와 전,열무김치 등 안동 양반가의 전통음식으로 차린 12가지 정갈한 반찬이 입맛을 돋운다.

잠은 묵은 집(고택)에서 잤지만 몸도 마음도 새로워진 느낌이다. 패스트푸드에 노출됐던 입맛은 어린 시절 고향의 맛을 기억해냈다.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나의 것을 내주었던 옛 사람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나만의 욕심을 당연시하는 마음에 일침을 가한다. 고택은 단순히 옛집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는 정신의 현장이다.


◆ 여행 팁

북촌댁(054-853-2110)은 올해 들어 '명품고택'이라는 브랜드로 거듭났다. 고택과 종택을 사대부가의 생활문화 공간으로 재현,명품 한옥체험장으로 만들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북촌댁을 시범고택으로 선정해 고가구와 생활소품,고급 침구와 전통한복 등을 대폭 지원했다. 북촌댁 큰사랑인 북촌유거와 안채 안방은 1박에 4인 기준 80만원,화경당(중사랑)은 3인 기준 30만원,수신와(작은사랑)와 안채 상방은 2인 기준 20만원이다. 집주인 유세호 씨가 집의 구조와 내력을 소상히 일러준다.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visitkorea.or.kr) 에서 '한옥에서의 하루' 코너에 들어가면 한옥 숙박정보가 상세하게 나와 있다.

안동=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