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빼앗으면 군주가 되고 물건을 빼앗으면 도둑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반란이란 쉽게 성공하는 게 아니다. 일곱 국가가 연합해 조정에 반기를 든 것을 일거에 잠재운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의 주아부(周亞夫)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기원전 154년 한 경제 때,오나라와 초나라 등 일곱 제후국이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주도자는 오왕 유비였으니,그는 오나라 지역의 광대한 땅과 풍부한 재력에 의지해 황제 자리를 탈취하려고 모의했다. 내막은 이렇다.

한 고조 유방(劉邦)은 항우(項羽)를 이기자 철저한 가족 중심의 통치체제를 구축하면서 통치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이성(異姓)을 배척하고 자신의 피붙이를 중심으로 제후왕을 삼는 정책을 취했다. 그 숫자는 100명을 넘을 정도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저마다 세력을 구축하며 다시 제(齊)나라,연(燕)나라,조(趙)나라,양(梁)나라,대(代)나라,회양(淮陽),초(楚)나라,오(吳)나라 등으로 통폐합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봉토는 아홉 개 군에 달했으며 천하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했다. 상대적으로 황제가 직할하는 군은 겨우 15개에 지나지 않았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제후왕들의 부가 증가하고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런 규정에 반기를 드는 이들이 생겨났다.

조정의 관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단호하게 반대파들의 주장을 배척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경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경제는 먼저 조나라의 상산군(常山郡),초나라의 동해군(東海郡),오나라의 회계군(會稽郡)과 예장군(豫章郡) 등의 통치권을 빼앗고 이 지역을 조정의 직할지로 삼았다. 그러자 기원전 154년 오나라와 초나라 등 일곱 제후왕이 연합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주모자는 오왕 유비였다. 유비는 제나라 치천,교동,제남 등 여러 제후왕의 참여를 독려했으며 교서,교동,제남,초나라,조나라 등 다섯 나라는 기병해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수도 장안은 그야말로 대단한 위협에 노출돼 있었다. 기원전 154년 정월 유비는 20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출발해 초나라와 손잡고 서쪽의 양나라를 우선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자 한 경제는 주아부에게 명령해 동쪽으로 오나라와 초나라를 공격하는 동시에 별도로 병력을 보내 조나라와 제나라에 대항하게 했다. 주아부는 지체없이 상황을 이렇게 분석해 전략을 보고했다.

"오나라 군대는 사기가 왕성하고 민첩해 그들과 정면으로 다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잠시나마 양나라를 오나라에게 넘겨주고 그런 연후에 적군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해야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사기 오왕비열전》)

한 경제가 그 계획에 동의하자 주아부는 군대를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해 낙양으로 진군했다. 주아부는 정예병을 보내 오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을 크게 무찔러 초왕 유무를 자살하게 했다. 오왕 유비도 군대를 잃고 몇 천명의 친위대만 데리고 달아나게 만들었다. 주아부는 승세를 틈타 추격하면서 오나라 장수들을 모두 붙잡아 그들에게 황금 1000근을 걸고 유비를 잡아오라고 했다.

1개월 만에 동월왕이 한나라 군대의 위협과 꼬임 아래 유비를 유인해 죽인다. 주아부는 석 달의 시간을 들여 반란군의 주력 부대를 쳐부쉈고 난을 평정했다.

평정 과정에서 주아부는 쌍방의 병력 상황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진격과 수비를 기밀하게 처리하면서 먼저 방어하는 전략을 취했다가 공격으로 전환하는 임기응변 전략으로 패색이 짙은 상황을 역전시켰다. 그 결과 자칫 정권의 몰락을 초래할 수도 있는 위기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오왕비열전》의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거듭난 것이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