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은 이미 알려진 분야에서 연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화두를 맨 처음 던진 사람한테 주는 상이다. "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한국인 과학자로 꼽히는 김필립 미국 컬럼비아대 물리학 교수(44)와 박홍근 하버드대 화학 및 물리학 교수(44),유전자 정보 분석의 세계적 권위자 스티븐 퀘이크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42)는 "한국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려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문화,실패와 모험을 장려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9일 서울대 CJ인터내셔널센터에서 황창규 지식경제부 연구 · 개발(R&D)전략기획단장과 가진 특별좌담회에서다. 이들은 R&D 전략기획단이 주최한 '글로벌 R&D 포럼 2011' 참석차 방한했다.

▼황 단장=미국은 반세기 넘게 세계 과학 기술계를 압도적으로 리드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퀘이크 교수=학과 간,학문 간 벽을 뛰어넘는 학제 간 연구를 꼽을 수 있다. 스탠퍼드대에 '바이오X'라는 복합 연구 프로그램이 있다. 생물학,외과의학,화학,응용물리학 등 온갖 분야를 결합해 연구한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교류하면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연구가 발전한다.

▼황 단장=3년 전 서울대에서 초빙강사로 융합 연구를 한 적이 있다. 서로 다른 분야 전문가 9명을 모아 팀을 만들었는데 솔직히 잘 안됐다. 한국에선 융합 연구가 왜 잘 안된다고 보나.

▼박 교수=학과마다 각자 영역을 지키려는 풍토가 강하고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가는 것을 독려하는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연구자한테 흔히 '무슨 과를 졸업했느냐'고 묻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김 교수=전혀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실 간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게 유리하다. 걸어서 5~10분 거리에 다른 연구실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소통이 이뤄진다. 제가 있는 컬럼비아대는 대학 부지가 좁아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이게 학제 간 연구에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

▼황 단장=최근 베이징게놈연구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개인의 유전자 정보를 분석해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이 지금 건당 5000달러인데 3~4년 뒤에는 1000달러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퀘이크 교수=유전자 정보 분석에는 정보기술(IT)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국은 IT 강국이니까 관련 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박 교수=내가 만들고 싶은 게 사람 몸에 집어 넣으면 질병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작은 컴퓨터칩 같은 거다. 한국은 IT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잘하고 있지 않나. 지금 잘하는 것을 다른 분야에 적용하고,발상을 바꾸는 용기를 낸다면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다.

▼황 단장=내가 반도체만 30년 이상 했는데 김 교수가 연구하는 그래핀(실리콘이나 구리보다 100배 이상 전기가 잘 통하고 다이아몬드보다 강도가 2배 이상 세면서 신축성이 좋은 신물질)얘기를 듣고 가슴이 뛰었다. 반도체 생산에 응용하면 한국이 세계를 리드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추정으로는 그래핀이 기존 전자 소재를 대체할 수 있다면 지금 반도체 시장의 10배 정도 되는 신시장이 열릴 것이다.

▼김 교수=좋은 비전이다. 그래핀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6~7년에 불과하다. 아직 역사가 짧은데 세계적으로 관심이 많다. 한국에서 이뤄진 연구 중 일부는 이미 세계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황 단장=작년에 교토대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교토대는 노벨상 수상자만 6명 배출했다. 한국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김 교수=작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그래핀 분야에서 나왔다. 한국에선 나도 포함됐어야 한다고 안타깝게 느끼는 분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볼 땐 분명 나보다 먼저 그래핀 연구를 시작한 분들이 있었고 그 분들이 상을 받은 거다. 노벨상을 비롯해 모든 권위 있는 상은 이미 알려진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상을 받으려면 연구자 스스로 큰 꿈을 갖고 연구해야 한다.

▼퀘이크 교수=한국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빨리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 됐기 때문에 한국인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한마디 조언을 한다면 기존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국적을 불문하고 노벨상 수상자의 면면을 보면 기존 권위에 도전한 아웃사이더가 많다.

▼박 교수=맞는 지적이다. 한국에는 이미 알려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연구자가 많은데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사람은 잘 안 보인다. 연구자가 모험적인 주제에 도전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