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쓰고 버리는 무엇인가를 발명하라." 1900년대 초 발명이 취미이던 한 병마개 세일즈맨에게 상사가 던진 말이다. 어느날 세일즈맨은 무뎌진 면도기날을 숫돌에 갈던 중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금속조각으로 면도날을 만들면 어떨까. 쓰고 버리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제품이 질레트 면도기다.

질레트는 판촉활동이 필요한 다른 영업맨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면도기를 팔았다. 껌 커피에 면도기를 끼워주는 마케팅도 시작했다. 롱테일 이론의 창시자인 크리스 앤더슨은 "질레트는 공짜 마케팅,미끼 마케팅의 원조"라고 평가했다.

100여년이 지난 뒤 식품업계에서 이 같은 전통을 이어받은 혁신적 제품이 나왔다. 스위스 회사인 네슬레가 고급 커피를 간단하게 즐기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꿰뚫고 '캡슐' 커피를 만든 것이다. 마케팅 전략은 커피머신을 싸게 팔고 캡슐은 제값을 받는 것이었다.

◆"기계는 싸게 팔고,캡슐에서 이익 내라"

네슬레는 1986년 자회사 네스프레소를 통해 커피머신 사업에 뛰어들었다. 가정용 커피머신 수요가 생길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소비자들이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방식을 익히고 즐기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네슬레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 개발한 결과 캡슐 커피를 탄생시켰다. 미리 로스팅한 커피 원두를 조그만 캡슐에 하나씩 진공 포장해 판매한 것이다. 캡슐을 커피머신에 넣고 누르기만 하면 자동으로 커피가 나온다. 커피 기계를 세척할 필요 없이 남은 캡슐만 버리면 된다. 보통 원두는 개봉 2주가 지나면 맛이 변하지만,캡슐 커피는 신선도가 유지된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대신 커피머신은 저렴한 가격에 팔았다. 일반 커피머신이 1000달러에서 5000달러를 호가하지만,이 머신은 150~200달러 수준에 가격을 책정했다. 면도기를 싸게 팔고 면도날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질레트의 전략과 같은 것이었다. 네스프레소 매출에서 캡슐 커피가 차지하는 비중은 2~3년 사이에 전체의 30%로 급증, 네슬레의 최대 수익원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경영전략가 게리 하멜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아이디어는 마라톤과 같다"며 "네슬레처럼 멀리 내다보고 지속적으로 서서히 시장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라"

네슬레는 지난달 25일 커피에 이어 캡슐 분유 '네스베이비'를 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캡슐 커피의 아이디어를 분유 사업에도 적용한 것이다. 캡슐을 기계에 넣고 버튼을 누르면 따뜻한 우유가 30초 이내에 나오게 만들었다. 모유 수유가 어려운 산모들을 겨냥한 제품이다.

캡슐 커피와 분유 이전에도 네슬레는 끊임없이 제품을 혁신해왔다. 1938년 인스턴트 커피를 처음 만들 당시에는 설탕만 첨가했다. 그 뒤에는 부드러움을 더하기 위해 프림을 함께 넣었다. 인스턴트 커피가 물에 잘 녹지 않는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액상 커피를 만들기도 했다.

2003년에는 미국 1위 아이스크림 회사인 드라이어스를 인수한 뒤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목시켰다. 5년간 수백만달러를 투자해 칼로리와 지방을 반으로 줄인 아이스크림을 개발했고,한 입에 먹을 수 있는 '딥스'를 내놓아 호평받기도 했다.

고급 생선류 냉동식품 시장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값싼 재료로 만든 냉동식품이 아닌 고급 재료를 사용한 제품을 주력 제품으로 만들었다. 혼자 사는 직장인과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냉동 식품의 수요는 점점 늘어나지만 고객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냉동식품은 많지 않다는 점에 착안했다. 네슬레는 '스토퍼'라는 브랜드로 미국 냉동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네슬레의 혁신정신에 대해 페터 브라베크 네슬레 회장은 "매년 20%의 제품을 새롭게 혁신하며,최대 50%를 다시 혁신하는 게 네슬레의 전략"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문화를 이해하는 전략

1970년 네슬레는 일본 시장에 진출했다. 당시 일본은 세계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잡아가는 성장기를 보내고 있었다. 네슬레는 커피 시장 규모는 국민소득과 비례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인스턴트 커피는 잘 팔리지 않았다.

네슬레는 프랑스 문화인류학자인 클로테르 라파이유('컬처 코드'의 저자)와 함께 일본인들의 커피에 대한 인식과 문화적 배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 커피 시장 최대의 적이 '차(茶) 문화'라는 것을 찾아냈다. 일본인 생활의 일부인 차 때문에 커피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전략을 내놓았다. 카페인 없는 커피향을 첨가한 어린 커피 소비자들에게 어릴 때부터 커피맛과 이미지를 각인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1970년대 초 전무했던 일본 커피 판매는 지난해 8억2000만달러(8900억원)에 달했다. 문화 장벽을 넘는 마케팅의 결과였다.

서구 국가들에서 이 같은 마케팅의 결과는 더욱 빛을 발했다. 영국인들은 네슬레를 영국 브랜드라고 생각하고,프랑스인들은 프랑스 브랜드라고 생각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현재 네슬레가 거느린 브랜드 숫자는 8000여종에 이른다. 그중 90%가 넘는 7500여종의 브랜드는 한국의 테이스터스초이스처럼 한두 국가에서만 쓰인다. 세계 시장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브랜드는 10여종에 불과하다.

최근 네슬레가 캡슐 분유의 주요 시장으로 아프리카를 꼽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프리카의 영아들은 여전히 오염된 물에 가루 분유를 탄 것을 마시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네슬레는 캡슐 분유는 위생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한다. 아기들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따뜻하고 안전한 이미지로 아프리카를 공략하는 셈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