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유럽여행 1번지의 영광은 프랑스의 몫이었다. 그러나 2007년을 기점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스페인이 처음으로 유럽 관광대국 정상에 오르며 프랑스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한 것이다. 당분간 스페인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지중해로 피서를 떠나던 프랑스인들조차 이제는 스페인으로 눈을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바캉스 철이면 피레네 산맥을 넘는 프랑스 자동차의 행렬이 이제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은퇴 후의 여생을 아예 스페인 동부와 남부에서 보내려는 사람들도 크게 늘고 있다.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이곳의 쾌적한 날씨를 첫 번째 이유로 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최근의 스페인 관광 열풍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결정적인 '2%'는 뭘까. 그건 아마도 유럽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이국적인 풍경을 이베리아 반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안달루시아의 광활한 황톳빛 평원,남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야자수와 오렌지 나무들,무엇보다도 그곳에 아로새겨진 무어인(북아프리카와 스페인에 거주하던 회교도)의 진한 문화적 자취가 방문객들을 중세의 낭만적 세계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런 스페인의 낭만적 여행지 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으로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베르사유궁 같은 기독교 세계의 궁궐에 비한다면 소박하고 그리 크지 않은 곳이지만 오늘도 무어인 왕의 옛 영화를 더듬어보기 위해 수많은 여행객이 고메레스 언덕을 오른다.

알람브라궁은 크게 왕의 집무 및 주거공간인 나스르 궁전,방어용 성채인 알카사바,여름 별궁인 헤네랄리페와 16세기에 카를로스 5세 황제가 세운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 등 모두 네 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곳은 나스르 궁전.14세기에 유수프 1세(1333~1354)와 그의 아들 무하마드 5세(1354~1391)가 대를 이어 세운 이 궁전은 이슬람 양식 건축의 백미로 정교한 기하학 문양 및 식물 문양을 새긴 대리석 아치와 석회 세공,화려한 채색 타일,벌집 모양의 천장 장식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도록 한다. 형상의 재현을 금지한 아라비아 율법의 협소한 제약을 비집고 예술의 정화를 이뤄낸 이름 모를 장인의 예술혼이 놀랍다.

인파에 떠밀리고 화려한 장식에 매혹되다 보면 정작 중요한 볼거리를 놓치게 마련이다. 알람브라궁을 나오고 나서 땅을 친들 소용없는 일이다. 작은 기도소 북쪽으로 뚫린 창 밖으로 알바이신 지구의 하얀 집들을 구경할 일이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는 바로 '린다라하의 안뜰'이다.

코마레스의 탑을 지나면 곧바로 황제의 방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창문 밖을 내다보면 아래로 이 아름다운 안뜰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1526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로스 5세가 알람브라를 자신의 거처로 정하면서 건물들을 증 · 개축하는 과정에서 만든 것이다.

린다라하의 안뜰은 수도원의 안뜰 같은 모습이다. 아치가 늘어선 'ㅁ'자형 회랑과 정원의 모양새가 그런 인상을 유도한다. 이곳은 원래 야외 정원이었는데 황제의 거처를 증축하는 과정에서 삼면이 막히면서 자연스럽게 안뜰이 된 것이다. 회랑의 기둥은 알람브라의 다른 궁전에서 가져왔고 안뜰은 전형적인 바로크풍 정원으로 꾸며졌다. 한가운데는 부근의 엘비라 산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컵 모양의 분수를 설치했고(1995년 복제품으로 대체됐다) 그 주변에는 기하학적으로 가지를 자른 화단을 배치했다. 화단 사이에는 오렌지 나무와 큰 키의 사이프러스를 듬성듬성 심어 자연과 인위를 대비시켰다.

이렇게 해서 아랍풍의 건물에 둘러싸인 바로크식 정원은 알람브라에 또 하나의 이국 정취를 덧붙였다. 아랍 건축과 서유럽 정원의 기묘한 어울림 때문이었을까. 이 매력적인 안뜰은 19세 초 미국의 외교관이자 문필가인 워싱턴 어빙에 의해 알람브라궁이 재발견된 이래로 예술가들이 가장 즐겨 방문하는 일종의 미의 순례지가 됐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스페인을 대표하는 인상주의 화가 호아킨 소로야(1863~1923)도 알람브라궁을 자주 방문했다. 그는 그때마다 린다라하의 안뜰의 이국적 풍취를 화폭에 담았다. 그중에서도 1910년에 그린 작품이 이 안뜰의 이국적인 멋을 가장 로맨틱하게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발렌시아 출신의 소로야는 19세기 사실주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지만 자신의 선배들과 달리 화려한 색감과 빛으로 충만한 화면 속에 스페인의 전통문화,스페인 사람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특히 1885년 파리를 방문한 이후로는 특유의 길고 거침없는 붓의 터치와 폭넓은 색채의 변주로 명성을 얻었다.

'린다라하의 안뜰'에는 그러한 프랑스 인상주의의 세례를 받은 흔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빛에 반사돼 하얗게 빛나는 사이프러스와 반들거리는 분수대의 대리석,빠르고 거칠게 내달은 춤추는 붓의 터치 속에서 그런 영향이 뚜렷이 느껴진다. 건물과 맞닿은 오렌지 나무가 건물의 황색 톤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눈에 비친 순간적 인상을 중시한 인상주의의 교의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실제보다도 과장된 붉은 빛을 띤 황색을 사용해 녹색과의 보색 대비를 유도함으로써 화면에 상큼한 느낌을 부여하고 진한 아라비아적 정서를 환기한 것은 전적으로 소로야의 재능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린다라하의 안뜰'은 유럽 안에서 유럽 밖의 정취를 환기하는 이국 정서의 매개체가 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스페인의 가장 큰 매력을 발견한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