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막장 기업드라마가 도를 넘어 판을 치고 있다. 시청률이 20%는 기본이고 30% 이상도 쉽게 넘어선다. 시사토론이나 교양 프로그램의 경우 시청률이 5%만 돼도 성공이라고 하는데 20~30% 시청률의 TV 드라마가 시청자에 미치는 영향력은 위력적인 것이다.

대부분 엇비슷한 주제로 경쟁하면서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기업드라마는 점점 더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내용 위주로 그려진다. 큰 기업이건 작은 기업이건 패밀리들이 하는 것은 경영권 다툼밖에 없다. 그것도 20대,30대의 새파란 경영후계자 후보들이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고 삼각 애정관계는 기본 메뉴이며,회사 내부사정을 외부에 알리기도 하고,외부의 힘을 빌려 경영권을 뺏고 뺏기는 것이 이야기 패턴이다.

관록의 그레이 헤어 중역들은 어느 줄에 설까 눈치 보기 바쁘고,심지어 며느리들까지 가세해 추악한 기업의 모습을 점입가경으로 만들어 낸다. 또 드라마의 기업창업자 가계에는 웬 출생의 비밀이 그렇게 많은지…,시청자들의 기업에 대한 인식을 음모 비리 불륜 탐욕의 종합선물세트로 몰고 간다. 대부분 창업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척으로 재산을 모았는데,2세에 와서는 헝그리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불법적인 재테크와 기업사냥,정체불명의 신사업 확장 등에 몰두해 공멸로 가려다 마지막에 비교적 착한 주인공의 손을 들어주고 막을 내리는,끝까지 안봐도 뻔한 이야기들이다.

과연 이런 것이 기업의 대표적인 모습일까. 물론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기업 사례도 적지 않지만,필자는 기업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개념이 '치열한 생존경쟁'이라고 본다. 기업 내부의 경영권 문제는 몇 사람의 음모,술수꾼들이 모여서 획책을 한다고 결정되는 사항이 아니다.

기업경영에는 2중,3중의 감시 장치가 있고 이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 작은 투자결정 하나라도 투명하지 않으면 기업이 유지될 수가 없다.

대다수의 기업은 대외적으로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나가고 경쟁력을 키워가는 데 모든 것을 바친다. 특히 우리기업들 중 몇몇 글로벌 대기업을 제외하고 나면 대기업이라고 해도 국제 기준에서는 중소기업 수준에 불과하다. 국내의 중소기업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경영진은 치열한 경쟁에서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전쟁을 한다. 더구나 요즘같이 국제 경제 상황이 수시로 바뀌고 어느날 갑자기 그 회사가 팔아오던 품목의 시장이 완전히 닫힐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 2세들은 대부분 현장에 가서 제대로 된 수업을 받고 있다. 한가롭게 출생의 비밀을 캐고,며느리까지 동원돼 경영권 다툼을 벌일 틈이 없다.

해외시장에서 경쟁자의 극심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바이어를 감동시켜 수출을 성사시킨 이야기,중소기업이 경영 위기로 벼랑끝까지 갔다가 사재를 다 털어 넣은 연구개발이 때맞춰 성과를 보여 기사회생한 이야기 등 극적 반전도 있고 스릴 있는 기업드라마의 소재는 우리에게 얼마든지 있다.

영향력이 큰 TV 드라마에서 기업을 좀 정확히 그려내고 우리 기업이 세계 시장을 향해 싸워나가는 모습을 담을 수는 없을까.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여류작가 야마사키 도요코의 《불모지대(不毛地帶)》같이 어떤 한 기업이 세계를 상대로 갖은 난관을 이겨내고 도전해서 성공하고,그 과정에서 뜨겁고 치열한 삶을 사는 풍운의 기업인을 주제로 하는 대하소설이나 드라마는 왜 나오지 않는 것일까.

요즈음 막장 기업드라마처럼 기업의 실상도 모르고 써낸 작품들은 실제 기업의 문제점은 제대로 짚어내지도 못하면서 반기업 정서만 자극한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기업과 기업인도 있지만,기업을 좀 더 사회 친화적인 존재로 그려내면 우리 사회에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

조환익 < KOTRA 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