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출근길.중견 제약회사 K 영업과장(40)의 옷차림이 달라졌다. 거래처인 A병원 방문 일정이 잡혀 있는 K 과장은 '슈트와 명품 넥타이,잘 닦인 구두' 대신 캐주얼 차림으로 변신했다. 제약사 영업사원의 트레이드 마크인 '007 가방'도 이날은 들지 않았다.

정부의 리베이트 조사가 강도 높게 이뤄지면서 나타나고 있는 풍속도다. 정부는 지난 5일 보건복지부 검찰청 식품의약품안전청 경찰청 등이 망라된 범부처 합동단속반을 출범시켰다. 제약사 영업사원들은 의사나 약사를 만나는 것 자체에 대해 단속원들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는 탓에 이런저런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고 푸념한다. C제약사의 한 영업사원은 "정부 출범 이래 최대 규모의 리베이트 조사가 이뤄지면서 거래처 의사들이 영업사원 출입을 당분간 자제해 달라는 문자를 보내왔다"며 "당분간 방문을 삼가라거나 (병 · 의원에)오려거든 모자를 쓰고 환자처럼 해서 오라는 곳도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일부 제약사들은 영업사원들에게 정장이 아닌 캐주얼 복장을 입으라는 권고를 내렸다. N제약사 관계자는 "친한 (병 · 의원의)실장이나 간호사들이 병원에 누가 조사를 나왔으니 방문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내주곤 한다"며 "영업사원들이 무슨 범법자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환경에선 꼭 필요한 거래처만 관리하고 나머지 시간엔 당구장이나 PC방을 찾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소제약사의 한 영업팀장은 "회사 차원에서 리베이트 조사에 대비한 모의연습을 시키고 있다"며 "혹시 모를 압수수색에 대비해 개인 USB는 물론 개인 차량에 갖고 다니는 약품 거래대장 관리에 만전을 다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J제약사 관계자는 "경력자들은 그나마 거래선과의 오랜 친분으로 끈을 유지하고 있지만 새내기 사원들은 신규거래를 트지 못해 퇴사를 고민할 정도"라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약사들의 영업 · 마케팅부서 인력 수급에도 비상이 걸렸다. 대형 제약사들을 중심으로 잇따라 공채를 진행하고 있지만 지원율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D제약사의 입사 5년차 영업사원은 "(제약사)영업사원 초봉이 비교적 다른 직종보다 높아 예전엔 후배들의 취업 문의가 많았는데 요즘은 '괜찮느냐'는 전화만 걸려온다"고 말했다. 그는 "상황이 호전되지 않으면 업종을 바꾸거나 국내 제약사보다 압박이 덜한 외국계 제약사로 이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영업사원들 사이에선 각종 조사설이 난무하고 있다. 지난주엔 강원도 원주지역에 영업소를 둔 P사 · H사 · K사 등 3개 제약사 조사설이 화제였는데,P사의 경우 원주 영업소가 없는 것으로 확인돼 해프닝으로 끝났다.

24일에 만난 국내 대형제약사의 한 베테랑 영업사원은 "수십년 동안 암묵적으로 주고 받으며 공존해온 제약업계 리베이트 관행이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을 때려잡겠다는 정부 정책도 이해할 수 없다"며 "제약업계가 범죄자 집단처럼 매도되는 현실이 견디기 힘들다. 가슴에 '근조(謹弔)'라도 달고 싶다"고 씁쓸해 했다.

이준혁 기자 rainbow@hankyung.com

☞ 의약품 리베이트

병 · 의원,약국 등이 특정 제약사의 약을 구매하게 되면 감사 표시로 금전적인 보상을 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판촉행위지만 지나치면 뇌물이 될 소지가 있다. 같은 성분의 약이라도 여러 제약회사가 만들기 때문에 자사의 약을 써달라고 리베이트를 주는 게 수십년간 관행이 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