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우리 아빠는 간장공장 공장장"
"'자,내일까지 기초생활조사서를 작성해 오도록 하세요. 안 해오면 매 3대 각오하고…'.이 지긋지긋한 것을 도대체 왜 매년 조사하는지 알 수 없다. 그냥 맨 처음 써놓은 걸 보면 될 것을.난 아버지 직업란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대체 이 칸을 또 무슨 단어로 채워야 한단 말인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은 정말 기억하기도 싫다. 아빠 직업란에 무심코 '간장공장 공장장'이라고 적었다가 졸업할 때까지 애들에게 놀림을 당하느라 무지하게 시달렸다….명색이 중소기업 임원이라지만 아빠는 깔끔한 양복 대신 너덜너덜한 점퍼차림으로 직장에 나가신다. 서류가방 대신 물통과 도시락,하얀 위생 작업복을 챙겨 가신다. 냄새나는 청국장 기계와 하루종일 씨름하신다. 말이 임원이지 청국장 만드는 막노동꾼이다…."

몇 년 전 '중소기업 사랑,청소년 글짓기 공모전'에 응모한 중3 여학생의 '우리 아빠는 간장공장 공장장'이라는 글이다. 물론 중학생이 돼서는 아빠를 충분히 이해하게 됐다고 덧붙였지만….

이 학생보다 더 수모를 당하는 것은 도금업체와 주물업체 근로자의 자녀들이다. 간장업체는 도금이나 주물업체에 비하면 양반이다. 남동공단의 한 도금단지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들만이 현장을 지킨다. 80세 가까운 근로자들도 있다. 경영자도 마찬가지다. 환갑 나이의 사장은 경영자 중 막내축에 든다.

젊은이들은 구경하기 힘들다. 채산성이 안 좋으니 제대로 대우해 주지 못하고,작업환경 개선에 엄두를 내지 못하니 젊은이들이 올 리 없다. 외국인 근로자들조차 기피할 정도다.

주물업체와 열처리업체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포함해 용접 금형 등을 '뿌리산업'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없으면 자동차 전자 정보통신 금속 조선 철강산업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중요하건만 상당수 기업인들은 몇 년 내 산업의 뿌리가 말라버리는 것 아닌가 걱정하고 있다.

반월공단의 한 도금업체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첨단 설비를 개발,냄새와 폐수없는 깨끗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직원이 대학 진학을 원할 경우 학비를 전액 대 준다. 20년 근속하면 쏘나타급 자동차도 사 준다. 이 회사는 부족한 인원을 채우기 위해 연줄 채용 등 갖은 방법을 총동원해 작년에 36명을 뽑았지만 퇴직자가 37명에 달했다. 이 회사마저 이럴진대 다른 회사는 말할 것도 없다.

정부는 뿌리산업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지난해 '뿌리산업육성책'을 발표했고 관련 지원법도 마련 중이다. 구조 고도화,인력 공급 확대,경영 및 기술역량 강화가 핵심이다. 지난 15일에는 부산에 도금업체 25개사가 입주하는 친환경 집적시설인 청정도금센터도 마련했다. 그런데도 기업인들은 채용은 여전히 어렵고 경영여건도 최악이라고 아우성이다.

어떤 대책이 더 필요할까. 우선 종업원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임대주택 우선공급이나 학자금 지원,병역특례 등 파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기업인을 위해선 상속세 면세 혜택도 확대돼야 한다. 한마디로 더욱 과감한 지원과 예산 배정이 필요하다.

뿌리가 시들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현장을 다녀보면 우리 뿌리산업이 막바지에 와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녀들이 "아빠는 자랑스런 도금 마이스터"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 올 것인가.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