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은 '분리돼 있던 두 개 이상의 요소들이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이거나,하나의 요소로 수렴되는 현상 또는 이런 양상을 따르는 모든 사회 · 경제적 현상'을 뜻한다. 예전에도 항상 존재했던 융합현상이 최근 중요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IT(정보기술) 혁명으로 촉발된 디지털 혁명이 기술 · 제품 · 산업 간 융합단계를 넘어 문화 ·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어서다. 특히 지난달 국회에서 '산업융합촉진법'이 통과됨에 따라 융합은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핵심 키워드로 부상했다. 융합혁명의 시대를 맞아 기업전략의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융 · 복합은 혁신과 성장의 본질

단세포 생물에서 영장류로 이어지는 진화는 만남과 섞임의 과정이다.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매트 리들리는 "유전자를 섞어주는 유성(有性)생식이 생물학적 진화를 가속시키듯,서로 다른 아이디어들의 결합이 문화의 진화를 가속시켰다. 집단지능의 융 · 복합이 새로운 혁신을 가능하게 만들고,그런 혁신이 사회의 성장과 변화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의 관점처럼 서로 다른 요소들의 융합은 기업 성장과 혁신의 본질적 측면이다.

독립적으로 발달한 신생 산업은 성장이 계속되면서 점차 인접 산업과 접점이 많아져 상호관계 측면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한다. 대략 인접 산업에 밀려 소멸되거나,인접 산업과 만나 신규 산업으로 재탄생하거나,인접 산업과 보완관계를 형성해 함께 성장하는 세 가지 경우로 귀결된다.

19세기 말 시작된 자동차 산업은 융 · 복합의 대표적 사례다. 초기 자동차는 엔진을 장착한 마차의 개념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점차 인접 산업의 성과가 자동차에 도입되기 시작한다. 에어컨이 대표적인 제품이다. 발명된 1902년 당시 거대한 에어컨이 자동차에 장착될 것으로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기술발전을 거듭,1939년 미국 팩커드 자동차에 에어컨이 접목됐다. 라디오도 같은 과정을 거쳐 자동차의 기본 품목으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자동차는 대표적 융 · 복합 제품으로 발전했다.

#기술 간 융합의 공급측면과 제품 · 서비스 융합의 수요측면

성숙한 산업과 기술이 인접영역과 만나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만드는 융합현상은 항상 존재해 왔지만,최근 들어 융합이 핵심 테마로 부각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과거와 달리 IT혁명이 촉발한 융합현상이 전방위적으로 미래산업 지도를 재편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전개된 디지털 혁명은 융합혁명의 서곡이었다. 과거 화학 전자 통신 방송 등 각각의 영역에서 발전해 오던 산업은 디지털 혁명이라는 블랙홀을 만나면서 경계가 희미해져 21세기형 기술,산업융합의 여건을 형성했다. 공급측면에서 발생한 기술기반 융합은 기존 기술의 진화와 융합을 통한 혁신기술 창조의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기존 기술 진화는 두 종류 이상의 기술이 결합한 신기술이 기존 영역에 적용되는 경우로 NVR,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이 대표적이다. 융합 혁신기술은 상이한 기술들이 융합돼 기존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발전이 이뤄지는 경우로 나노일렉트로닉스와 DNA칩 등이 그런 사례다.

수요측면에서 진행된 제품-서비스 융합도 비슷하다. 기존 제품이나 서비스가 복수로 결합,각각이 가진 효용을 동시에 제공하는 경우로 복합기(인쇄기+팩스) TPS(triple service play) 스마트폰(휴대폰+PDA)이 이에 해당한다. 기존에 관련성이 낮은 것으로 인식되던 둘 이상의 제품-서비스를 융합,기존에 없던 새로운 가치와 효용을 제공하는 경우는 애플 아이팟과 아이패드,의료관광,온라인 에듀테인먼트가 대표적 사례다.

산업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융합현상 중에서 특히 제품-서비스의 융합은 시장질서의 재편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MP3 플레이어 생산기업들은 애플의 아이팟과 아이튠스라는 제품-서비스 융합 사업모델에 처져 시장 주변으로 밀려났다. 노키아는 불과 3년 만에 아이폰 돌풍에 휘말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조조정에 직면해 있다. 아이폰은 스마트폰에 앱스토어라는 제품-서비스 융합모델이 성공 요인이다.

#핵심 성공요인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융합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는 융합혁명 시대에 기업이 성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기술융합 능력이지만,충분조건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력에 있다. 기술을 기반으로 상상력과 문화를 결합시켜 소비자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역량이 미래 기업판도를 바꿀 것이며,이런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전 세계 SNS 열풍을 몰고 온 페이스북이 대표적 사례다. 인터넷 웹 기술에 기반한 사업모델인 페이스북은 최첨단 기술적 역량을 기반으로 시작된 사업이지만,이 모델이 단기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외로움'에 소구했기 때문이다. 아이팟에서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일련의 애플 제품도 마찬가지 맥락에 있다. 첨단기술의 결집체인 디바이스를 아날로그적 감성에 충실한 디자인과 인터페이스로 창조한 것이 성공의 출발점이었다.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감성이 미래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각되는 이유는 인간의 감성이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디지털 시대를 경험한 것은 불과 30여년이지만,호모사피엔스로 살아온 아날로그 시간은 30만년이 넘는다. 결국 평범한 인간이 생활하는 공간과 사용하는 제품은 아날로그적 인터페이스를 통해 디지털 기술과 접목돼야 생명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업모델이나 제품 개념에서 첨단 디지털 기술과 전통적 아날로그 감성을 결합시킬 수 있는 융합능력이 미래 기업경쟁력의 핵심으로 부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TV시장 판도 바꾼 디지털과 문화의 융합

한국 최초의 TV는 1966년 금성사에서 생산됐다. 일본보다 13년이 늦었다. 삼성이 뒤따랐지만 일본 히타치,산요 등에서 기술을 도입하는 수준이었다. 컬러TV 방송도 일본보다 12년 늦은 1980년 시작됐다. 일본이 주도했던 세계 TV시장은 2000년대 초반 한국발(發) 지각변동을 맞았다. 까마득히 앞서나간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던 한국의 삼성과 LG가 세계 TV시장의 주역으로 올라선 것이다. 한국 TV산업은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이행하는 변곡점을 기회로 삼아 TV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역전요인은 디지털 기술이라는 필요조건에 제품-문화 융합이라는 충분조건에 있다.

1998년 한국은 세계 최초의 디지털TV를 개발했다. 일본이 차세대HDTV를 브라운관TV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때,한국 기업은 새로운 기술인 디지털 기술에 승부를 걸었고 시장도 LCD,PDP 등 얇은 TV로 중심이동을 하면서 주도권 이전이 시작됐다. 결정적 승부처는 제품에 문화를 융합한 디자인 혁명이었다. 일본 제품에 비해 브랜드 인지도가 떨어지던 삼성은 와인잔의 이미지와 색감을 TV에 적용한 보르도TV를 출시,500만여대를 판매했다.

#융합혁명 시대 기업대응 방향

서로 다른 영역의 기술이 만나고 신사업이 탄생하는 것은 산업발달의 기본원리이지만,최근 융합혁명의 특징은 속도와 범위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전개된다는 점이다. IT가 기폭제가 돼 급속히 전개되면서 기존산업 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융합혁명에 대응한 기업의 대응은 사업전략,기술-R&D전략,인력재편 등 경영 전반에 걸쳐 융합관점에서 조명하는 방향으로 일어나야 한다.

제품과 서비스의 융합은 필연적으로 개발-생산에 필요한 기반기술과 R&D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어 필요지식의 확장,인재상의 재정립으로 연결된다. 특히 기술융합 중심으로 전개된 '융합1.0' 단계가 기술과 문화,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융합돼 새로운 소비자 가치를 제안하는 '융합2.0' 시대를 맞아 기업은 과거 제한된 범위에서 바라보던 기술과 산업을 뛰어넘는 폭넓은 관점과 이를 사업모델에 적용하는 새로운 차원이 실행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이런 실행능력은 과거처럼 계획을 세우고,조직을 이끌어가는 형태가 아니라,다양한 기술과 아이디어가 융합될 수 있는 생태계를 기업 내부에 형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융합의 핵심인 기술과 아이디어는 결국 사람에게 체화돼 있기 때문이다. 융합네트워크 시대의 특징인 공동가치 생산,개인 상호간 영향력 증대,집단지성 중요성 증가를 기업경쟁력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을 공동의 가치와 목적으로 연결시키는 플랫폼을 형성해 비즈니스 주도권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융합시대 기업전략의 핵심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