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가보니…두 목소리 팽팽
"개혁 시행 전부터 우려 커…예고된 부작용"
"원인을 차등적 등록금제로 몰아가면 안돼"
"하루빨리 이 악몽에서 벗어났으면…."
올 들어 4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 이어 지난 10일 교수까지 유서를 남기고 숨지자 KAIST 교정은 11일 큰 충격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모든 수업을 중단한 이날 캠퍼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따스한 햇살에 벚꽃과 개나리 등 봄꽃들이 활짝 피었지만 학생들의 얼굴에서는 좀처럼 봄기운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침 일찍 기숙사에서 출발한 셔틀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은 대부분 침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심정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날부터 이틀 동안 전면 휴강에 들어갔지만 교수와 학생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예정된 사제 간 대화에 참석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교수와 대학원생,학부생들이 별도로 모여 이번 사태의 원인을 분석하고 수습책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의과학과 대학원생 임모씨(24)는 "대학원생 간담회에 참가하기 위해 나왔다"며 "후배들이 막다른 선택을 한 데 대해 마음이 아프고 참담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생명과학 연구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로 이름을 날렸던 박모 교수가 전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놓고 망연자실한 분위기였다. 4명의 학생에 이어 교수까지 자살하자 "악몽 같은 비극이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이냐"며 할 말을 잃었다.
바이오 및 뇌공학과 대학원생 오모씨(26)는 "교수님의 비보를 듣고 마음이 정말 착잡했다"고 말했다. 그는 "팀별 프로젝트도 있지만 개인별 과제가 많아 학생들이 혼자 기숙사에 있는 시간이 많고 소극적인 학생들은 문제가 있어도 주위에 도움을 청하기 쉽지 않다"며 "진심으로 고민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교수협의회는 오전 9시30분께부터 운영위원회를 열었다. 이어 오후 1시부터 2시간 가까이 비상총회를 열어 서 총장에게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놨다. 학부 총학생회도 일련의 사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발표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단 교직원들은 학내 간담회와 교수협의회 대책회의 등으로 바빴다.
학생들은 후배와 동료,스승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살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한 학생은 "징벌적 등록금제 등 개혁정책이 시행되기 전부터 우려를 표했고,과도한 경쟁으로 몰아가면 자살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며 "그럼에도 총장은 일관되게 무시해왔고 지금의 사태가 발생했다"고 비판했다. 전자학과 대학원에 다니는 이모씨(25)는 "학교 시스템이 학생들에게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며 "학생들의 소통 요구를 거부한 총장의 책임이 크다"고 거들었다.
하지만 전자학과 4학년 권모씨(24)는 "공부가 어려운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인데 외부에서 너무 차등적 등록금제의 문제로만 몰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학생도 "총장의 개혁정책이나 등록금 제도에만 문제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며 "숨진 학생들 일부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만큼 자살방지센터나 복지시설 마련,심리상담 등의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총장 퇴진 운동에 나선 학생과 동문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경영과학과 3학년 성준식 씨(24) 등 10여명은 13일로 예정된 비상학생총회에 총장 퇴진을 안건으로 상정하기 위한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성씨는 "학칙에 따라 학생 200명의 서명을 받아 총장 퇴진안을 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KAIST 89학번 동문회는 학생식당 앞에 '서남표 총장은 즉각 사퇴하라'는 문구가 담긴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이들은 "서 총장은 KAIST의 긍지와 명예에 자살공화국이라는 수치스러운 꼬리표를 달아놓았다"며 "깨끗이 물러나라"고 주장했다.
대전=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