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 Issue Focus] 쫄딱 망한 경험도 '자원'으로 활용…이스라엘 벤처를 배워라
지난해 '창업 국가(Start-Up Nation)'를 번역 출간해 화제가 됐던 윤종록 알카텔루슨트 벨연구소 특임 연구원(전 KT 부사장 · 55)은 요즘 벤처 육성 방안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스라엘 경제 성장의 비밀을 다룬 책을 번역한 것을 계기로 이스라엘에서 벤처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지를 탐구 중이다. 그는 이스라엘 벤처가 강한 이유로 △창의성 △도전의식 △장기적 안목의 벤처 투자 △네트워크 등을 꼽았다.

윤 특임연구원은 한국에도 이런 토양이 마련돼 벤처 산업을 일으켜 세워야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6일(현지 시간) 벤처 연구를 위해 이스라엘 현장 방문을 추진 중인 그를 만나 벤처 활성화 방안과 벤처인의 자세를 들어봤다. KT에서 통신망 현대화 작업을 추진하고 세계 최초로 인터넷을 통한 소프트웨어 판매사업인 '비즈메카'를 선보이기도 했던 그는 2009년 8월부터 특임연구원으로 뉴저지에 있는 벨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목장에 송아지가 많아야 앞으로 더 많은 젖을 짤 수 있습니다. 벤처 기업들의 혁신은 전체 산업의 활력소 역할을 하게 됩니다. 미국 인구조사통계국에 따르면 미국 일자리의 대부분은 창업한 지 5년이 안된 신생 기업들에서 나왔습니다. 카우프만재단의 칼 슈람 이코노미스트가 미국이 세계 경제의 리더가 되고 싶으면 창업이 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아직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한국도 정책적으로 벤처 산업 육성에 힘쓰고 있지 않습니까.

"벤처가 활성화되려면 절박한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워낙 자원이 없는 나라죠.그런 위기감이 창업경제에 대한 도전의식을 갖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의사 변호사보다 벤처사업가가 더 존경받습니다. 그런 환경이 필요합니다. 특히 정보화 지식산업으로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만큼 창의성이 필요하죠.그런 창의성을 근간으로 한 벤처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노력을 범국가 차원에서 기울여야 합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요.

"보통 벤처기업이 성공해서 기업공개(IPO)까지 가는 데 10~14년 걸립니다. 한국의 벤처 자금 지원은 5~7년에 불과합니다. 이 기간 중 수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들은 추가로 연구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여의치 않죠.미국과 이스라엘에서는 인수 · 합병(M&A)시장이 활성화돼 있습니다. 한국은 관련 시장 형성이 미흡해 벤처 기업이 성공할 확률이 그만큼 떨어집니다. 도전적인 젊은이들이 목장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어야 하는데,한국은 결과적으로 울타리가 높은 편입니다. 벤처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했을 때도 이를 '자원'으로 흡수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

▼벤처산업 활성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두(話頭)가 창의성입니다.

"그렇습니다.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이스라엘 회사들은 유럽 기업들보다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벤처기업을 탄생시킨 것은 창의성을 강조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부모들은 자녀들이 학교에 다녀오면 뭘 질문했는지를 묻습니다. 그만큼 창의력을 중시합니다. 세계 최고의 기업들이 이스라엘 벤처기업을 인수하려거나 이스라엘에 연구 · 개발(R&D) 센터를 두려는 것은 이 같은 창의성을 활용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입니다. 샤이 아가시가 소프트회사인 SAP에서 임원으로 근무하다 전기자동차 사업을 이스라엘에서 시작한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브리티시텔레콤에서 혁신을 담당하는 게리 샤인버그 부사장은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미국 실리콘 밸리보다 이스라엘에서 더 많이 나온다고 얘기할 정도입니다. "

▼기술을 사고 팔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연구개발 성과가 상용화로 신속하게 이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대학에는 OTT(Office

of Technology Transfer)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대학의 연구성과를 전 세계에 내다 파는 역할을 합니다. 히브리대는 1년에 10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입니다. 기술은 자본과 연결돼야 빛을 볼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제도가 벤처 산업 활성화의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

▼벤처인 스스로도 바람직한 자세가 필요할 텐데요.

"벤처인들은 열정과 기술로 승부를 내겠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 미국의 대표적인 정보기술(IT) 기업 창업자들은 창의력을 바탕으로 세상을 변화하겠다는 의지가 강합니다. 수익만을 좇다보면 미래에 대한 꿈을 잃을 수 있죠.그만큼 초심이 중요합니다. 꿈이 없으면 더 이상 벤처가 아닙니다. "

▼대기업이 벤처활성화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창의성을 중시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예를 들어 라면회사인 농심이 전국 고등학교에 메일을 보내 수학 능력은 떨어지지만 요리에 관심이 많은 학생을 추천받아 연구소에서 한식 세계화 연구를 맡겨도 좋습니다. KT 같은 통신회사들은 게임 마니어들을 데려다가 다양한 게임을 만들도록 할 수 있습니다. 공부만 잘하는 학생들을 선발하는 방식은 옛 모델입니다. 튀는 아이들이 설 땅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인도의 NIIT가 전국에 컴퓨터학원을 내고 수학 잘하는 학생들만 불러들인 게 인도 IT산업이 강해진 배경이었죠.전 세계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의 50%가 인도인입니다. "

▼벨연구소에서는 어떤 연구를 하고 있습니까.

"김종훈 사장과의 인연으로 벨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위 연구원들에게 생명이 없는 프로덕트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안을 찾도록 자문하고 있습니다. 소모되는 칼로리를 계산하는 운동화와 음식 염도를 재는 숟가락 등 하드웨어 안에 IT를 통해 혼(魂)을 불어넣는 기술이 중요합니다. 벨연구소는 외부 아이디어와 연구소의 기술력을 접목하기 위해 벤처 담당 부사장을 두고 있을 만큼 벤처에 관심이 많습니다. "

▼앞으로 연구 계획은.

"창업을 매개로 한 국가경제의 성장전략을 연구해 벤처가 미래 성장동력이라는 인식을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에는 RAD라는 그룹이 있어요. 나스닥에 상장된 계열사가 30개에 달합니다. 벤처 재벌인 셈이죠.그런 기업이 어떻게 생성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는지를 구체적으로 연구해보려고 합니다. 한국 기업과 어떤 점이 비슷하고,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꼼꼼히 따져볼 생각입니다. "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