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 박정란 등 원로 작가들만 1주일 전에 대본을 내놓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책임감이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중견작가나 신진작가들은 쪽대본을 내놓습니다. 주 5회 촬영이라면 3~4회 대본은 하루 전,1~2회 대본은 당일에 나오는 게 보통이죠.당일 촬영분 쪽대본이라도 야외 분량이 먼저 나오고,스튜디오 촬영분은 나중에 나오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러다 보니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없어요. "

중견 탤런트 A씨의 말이다. 그는 "앞뒤 내용을 모른 채 우리가 무슨 얘기하고 있느냐고 쑥덕거리기 일쑤"라며 "이 문제는 전적으로 작가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MBC 드라마 '욕망의 불꽃'의 배우 조민기와 정하연 작가의 공개적인 언쟁을 계기로 드라마 제작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류 드라마로 아시아 맹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현장 시스템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쟁의 불씨를 지폈던 조민기는 일단 사과성명을 내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다. 그는 1일 소속사를 통해 "개인적인 넋두리가 공론화되고 그로 인해 함께 작업한 많은 스태프와 연기자 선 · 후배님,'욕망의 불꽃'을 사랑해주신 시청자분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드리게 된 점에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정하연 작가님에게도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고 밝혔다.

그는 앞서 트위터에 "'완벽한 대본'이라며 녹화 당일날 배우들에게 던져주며 그 완벽함을 배우들이 제대로 못해준다고 하더이다"라고 썼고,이에 대해 정 작가는 "하루만 당일 대본을 줬고 나머지는 1주일 전에 줬다. 사과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며 발끈했다.

이 같은 언쟁은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작가 파워가 지나치게 큰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내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는 쪽대본이 나올 때까지 연출자와 배우,스태프 등 수십명이 기다려야만 한다. 작가는 창작의 고통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이 같은 상황은 방송사가 시청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가능성 있는 작가의 프로젝트를 대본이 완성되기도 전에 선점한 데서 오는 후유증이다.

이응진 KBS 전 드라마 국장은 "드라마를 승패 개념으로만 파악한 게 근본적인 문제"라며 "결과적으로 문화 생산자가 풍요로워지지 못하고 피폐해졌다"고 말했다. 김영섭 SBS 책임프로듀서는 "배우는 늘 좋은 작품에서 연기를 하고 싶어하지만 쪽대본으로는 이게 어렵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고 지적했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보다 드라마 대본이 훨씬 빨리 나온다. 중국에서는 검열 문제로 대본이 일찌감치 제출된다. 일본은 제작에 돌입하기 4~5개월 전에 완성된 대본이 나오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미국은 이보다 더 일찍 나온다. 본방송뿐 아니라 재방송 스케줄까지 고려해 제작하기 때문이다.

방송계에서는 국내에서도 일단 작가들이 대본을 촬영 며칠 전에 내놓도록 시스템화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사전 제작 시스템을 갖춰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도 이는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KBS의 한 PD는 "시청률 추이에 따라 작가가 대본을 수정해 나간다고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사전 제작이 이뤄져야 완성도가 높아지고 수출도 순조롭다"고 얘기했다.

방송사의 수출 관계자는 "대본이 미리 나오면 해외 바이어들과 수출 · 투자 · 합작 등에 관해 상담하기가 훨씬 쉽다"며 "자료가 많으면 대처 방안도 넓어지는데 하루살이식으로 이뤄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