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자본시장법 도입 당시 금융시장에서는 '한국판 골드만삭스' 탄생에 대한 꿈이 고조됐다. 각종 금융규제가 완화된 만큼 당장은 아니더라도 골드만삭스처럼 해외시장에서 활약하는 글로벌 투자은행(IB)이 출현할 것이란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탓에 국내 증권사의 해외 진출은 자본시장법 도입 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 최근 삼성증권을 필두로 한 대형 증권사들이 해외시장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과 더불어 세계경제의 'G2'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중국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아시아 금융시장의 허브인 홍콩시장에 대한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증권사,해외 진출 가속

국내 증권사들이 해외에 현지법인이나 사무소 형태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 중반부터다. 현재 국내 10대 증권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해외거점은 총 57곳이다. 그동안 국내 증권사들의 해외비즈니스는 글로벌 기관투자가로부터 한국물(한국 주식 · 채권) 주문을 받는 단순 중개업무 수준에 그쳤다. 한국물 중개를 통해 손쉽게 돈을 버는 '저비용 · 저수익'모델에 머물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시장법 시대에도 이런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7년 417억원이던 국내 10대 증권사 해외법인의 순이익은 자본시장법 도입 이후인 2009년(회계연도 기준)에는 195억원으로 오히려 줄었다. 작년 상반기의 경우 194억원 손실을 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고 있다. 단순히 한국물 중개에만 그치지 않고 현지물 중개,기업공개(IPO) 주관,인수 · 합병(M&A) 자문 등 증권업의 전 분야를 아우르는 비즈니스 모델을 해외에서도 구축하기 위해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는 것이다.

삼성증권은 2009년 8월 홍콩법인에 1억달러 유상증자를 단행,현지의 글로벌 증권사들과 정면승부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 올해는 대만 싱가포르에도 현지법인을 설립할 계획이다. 대우증권 역시 지난해 두 차례의 유상증자(약 6500만달러)를 통해 홍콩법인의 자본금을 1억달러 규모로 키웠다. 대우증권은 홍콩법인을 해외사업의 컨트롤타워로 삼아 향후 아시아지역에서 IB사업을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우리투자증권은 홍콩법인에 보다 많은 인적 · 물적 역량을 투입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의 경우 국내 증권사 중 유일하게 브라질 상파울루에 현지법인을 작년 8월 설립했다. 작년 말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을 개통해 개인고객들로부터 주식 계좌신청을 받고 있다. 김성하 미래에셋증권 전략팀장은 "브라질 법인은 개인고객을 대상으로 한 소매영업까지 포함하는 현지 종합증권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국내 다른 증권사의 해외법인과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기동환 우리투자증권 글로벌 사업담당 상무는 "대형 증권사들은 기본적으로 국내와 똑같은 비즈니스모델을 홍콩에서도 만들겠다는 구상"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올해가 증권업계 해외사업의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경쟁력 위해 대형화 필수

국내 증권사들이 이처럼 해외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은 국내 시장에 안주해서는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다. 박준현 삼성증권 사장은 "IPO나 회사채 인수 등 IB업무에서는 저가 수수료 경쟁을 벌일 정도로 국내 시장은 '레드오션'으로 변한 반면 금융자산 규모가 커지면서 더 이상 한국 시장만 커버해서는 고객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힘든 상황이 됐다"며 "해외시장 개척은 이제 증권사 성장을 위한 필수과제가 됐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증권사들의 해외진출 시도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선 갈 길이 멀다. 정영채 우리투자증권 IB사업본부장은 "홍콩시장은 1년에도 수많은 증권사가 새롭게 생겨났다가 몇 년을 못 버티고 소리 없이 사라진다"며 "확고한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하지 않으면 해외사업은 별 성과 없이 돈만 낭비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따라서 보다 신중하고 전략적인 접근을 주문하고 있다. 신보성 자본시장연구원 금융투자산업실장은 "해외로 나간 증권사들이 초기부터 현지 대기업의 딜(deal)을 따기는 힘들다"며 "글로벌 증권사들이 놓치고 있는 중소규모 딜부터 수행하면서 트랙레코드(업무실적)를 쌓아 대형 딜로 옮겨가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신 실장은 또 "해외진출 지역 선정시에도 내수시장 규모,경제성장 속도,실물경제와 금융 간 격차,지리적 근접성 등 네 가지 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천기 크레디트스위스(CS) 한국법인 대표는 "특화된 분야에 주력할 수도 있지만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대형화가 먼저 필요하다"며 "크레디트스위스가 150년 동안 끊임없는 M&A를 통해 글로벌 증권사로 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춘 한국 기업들이 해외에 나가 비즈니스하는 데 필요한 금융서비스를 빈틈 없이 제공해 나가면서 고객군과 투자자 네트워크를 점차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