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방 제대로 안돼…"술 안마시면 추위 못견뎌"
인력시장 일용직 일감 절반으로 `뚝'

17일 종로구 창신동 쪽방촌에서 만난 최명순(79) 할머니는 전열기 앞에 바싹 붙어앉아 휴대용 가스버너로 물을 끓였다.

기름보일러가 3년 전에 고장 났지만 주인이 고쳐주질 않아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는 최 할머니는 자주 마른기침을 했다.

최 할머니는 "추우면 보일러가 얼어 터질까봐 골치 아팠는데 차라리 고장 나서 잘 됐다"며 "춥게 지내면 오히려 건강에 좋다"는 말로 위안을 삼았다.

서울의 최저기온이 10년 만에 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한파가 맹위를 떨친 올겨울 쪽방촌의 홀로 사는 노인, 일용노동자, 노숙인들에겐 이번 칼추위가 유난히 더 살을 에는 듯이 파고든다.

◇쪽방촌에 사실상 갇힌 노인들 = 종로구 돈의동 103번지 쪽방촌은 골목길마다 배수관 동파로 두꺼운 얼음판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쪽방촌 한복판에 사는 김태일(79) 할아버지 방은 동네에서 몇 안 되는 기름보일러를 쓰는 곳이지만, 주인이 하루 3~4시간만 보일러를 틀어줘 사실상 냉골 그 자체였다.

지체장애 2급인 김 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는데 얼음이 언 집 밖으로 못 나간 지 열흘이 넘었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김 할아버지는 "작년, 재작년보다 올해가 유난히 춥다"며 "새벽에 잠이 안 와서 깰 때가 잦고 낮에도 이불을 감싸고 집에만 있는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영등포 쪽방촌에서 만난 전복주(58)씨는 "연탄보일러를 쓰는데 연탄은행에서 지원을 받아 지내기가 훨씬 수월했다"며 "쪽방 노인들은 난방이 안 돼 고생하는데 바깥에도 못 나오고 꼼짝 못하고 집 안에서만 지낸다"고 전했다.

◇`온기' 찾아 나서는 노숙인들 = 17일 오후 서울역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이어지는 지하도에는 노숙인 10여명의 잠자리가 쭉 늘어서 있었다.

5~6명은 침낭을 얼굴까지 끌어올린 채 잠을 청했고, 몇몇 노숙인은 절반쯤 마신 막걸리병을 옆에 두고 담배를 피웠다.

지하도에서 만난 노숙인 박모(50)씨는 추운 날씨를 어떻게 견디는지 묻자 "죽지 못해 산다.

라면 끓여먹을 돈 천원이나 있으면 좋겠다"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추워서 잠을 청할 수가 없다"고 했다.

비슷한 시각 눈 쌓인 서부역 앞 구름다리에도 종이 상자에 이불을 깔고 비닐과 테이프로 바람을 막은 노숙인들 이부자리가 여기저기 깔려 있었다.

추운 날씨 탓에 서울역 광장 대신 서울역 대합실 안으로 몰려 종이상자나 침낭을 둘러맨 채 서성이는 노숙인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서울역파출소와 중구청에 따르면 서울역지하도와 대합실 등에서 지내는 노숙인은 200여명 정도이고 을지로입구역 일대에 30~40여명이 머무르고 있다.

서울역파출소 관계자는 "올해 서울시에서 혹한기를 맞아 임시 주거지원정책을 마련해 90여명 정도가 2~3개월 쪽방에서 살고 있다"며 "올겨울 동사한 노인은 없고 서울역 노숙인 1~2명이 지병과 건강 악화로 숨졌다"고 말했다.

예년 1월보다 추운 탓에 노숙인 쉼터에도 사람들이 몰려서 용산구의 한 노숙자 사회복지시설은 수용 적정 인원 210명이 벌써 꽉 찼다고 전했다.

◇꽁꽁 얼어붙은 인력시장 = 파출부나 주방보조 등을 연결해주는 직업소개소는 추위에 별 영향이 없는 듯하지만 아파트 등 건설공사 현장 일용직 노동자를 알선해주는 인력시장은 한파에 사실상 얼어붙었다.

구로구 가리봉동 남부인력거래소 관계자는 "날씨가 추워서 건설회사들이 안전사고를 우려해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크레인을 안 돌리는 경우가 많다.

작업을 안 하니 인력을 아예 안 뽑는 곳이 많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겨울철 평일에는 보통 400~450명이 일감을 구하러 나오고 약 300명 정도는 하루 일거리를 찾는데 이날 새벽에는 250명 정도가 인력시장을 찾아 200명도 채 일감을 못 구했다고 했다.

주말에는 50명 이하만 거래가 성사돼 인력시장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날씨가 추우면 적게 뽑는다는 사실을 알고 평소보다 적은 수의 사람이 나온다"며 "그래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추운 날씨에도 일거리를 찾으러 꾸준히 나오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연정 이지헌 김효정 기자 yjkim84@yna.co.krpan@yna.co.krkimhyoj@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