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화된 조직·중간간부 없어…창의적 아이디어 막히지 않아
1958년 설립 후 줄곧 흑자행진…13년 연속 '일하기 좋은 기업'
세계적인 경영학자 게리 해멀 런던비즈니스스쿨(LBS) 교수는 2007년 출간한 저서 '경영의 미래'에서 대표적인 혁신기업으로 3개 기업을 선정했다.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업체인 구글과 미국 최대 유기농 식품업체인 홀푸드마켓, 그리고 야외활동복에 두루 쓰이는 고어텍스 제조사인 고어였다.
구글이나 홀푸드마켓과 달리 고어는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다. 고어텍스라는 브랜드는 유명하지만 기업 고어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비상장기업이기 때문에 경영실적도 공개하지 않는다. 2008년 매출이 25억달러(2조8000억원)라는 사실만 가장 최근의 경영지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등산복을 비롯해 각종 스포츠 등 아웃도어 의류에서 고어텍스가 빠지는 분야는 드물다.
◆작은 조직이 효율적이다
관련업계에선 고어를 1958년 설립 이후 단 한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진짜 알짜 기업이라고 평가한다. 매출 증가율도 매년 10%를 꾸준히 넘는다. 뿐만 아니라 고어는 미 경제 격주간지 포천이 지난해 발표한 '미국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중 12위에 올랐다. 1998년부터 13년 연속 여기에 포함됐다.
전문가들은 고어를 '기업계의 이단아'로 평가한다. 기존에 검증된 경영방식이나 조직문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혁신을 통해 성공을 일궈냈기 때문이다. 고어에는 200명이 넘는 공장이나 조직이 없다. 직원 수가 200~250명이 넘으면 의도적으로 쪼개서 작게 가져간다. 공장을 건설하는 데 추가 비용이 들더라도 조직을 나누는 것은 변함없다. 일반적인 경영관리 측면에서 볼 때 많은 비용이 드는 이런 선택은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고어는 "작은 조직에서 나오는 장점이 이런 비용을 상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고어 창업자인 빌 고어의 '나눠라, 그래야 커진다(Divide,so we can multiply)'는 철학에 기반을 둔 것이다. 글로벌 종합화학회사인 듀폰의 엔지니어로 일하던 빌 고어는 44세 때 회사를 뛰쳐나와 1958년 고어를 설립했다. 듀폰과 같은 거대 기업에서 자신의 능력이나 창의성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낸 아이디어가 팀 간부들로부터 무시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작은 조직은 큰 조직에 비해 항상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직원 수가 너무 많으면 구성원들이 협력하고 경쟁하는 데 해롭다고 생각했다. 이병주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200명이 되지 않는 작은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다"며 "이를 통해 창의와 혁신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 고어의 성공비결"이라고 말했다.
◆직급이 없는 조직을 만들다
고어의 정식 명칭은 '고어와 동료들(W.L.Gore & associate)'이다. 회사를 창업할 당시부터 사장과 직원이 아닌 동료들끼리 모인 조직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다. 실제로 고어엔 조직 내에서 위계를 나타내는 직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고어 직원들의 명함엔 '동료(associate)'라는 직함만 쓰여 있다.
최고경영자(CEO)와 최고재무책임자(CFO)만 공식적인 직급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상법상 회사 설립 요건으로 필요한 것일 뿐 CEO와 CFO 모두 회사에선 '동료'로 불린다. 당연히 관리자나 보스도 없다. 이 같은 방식은 일반적인 경영관리(management)원칙과 맞지 않는다. 테리 켈리 고어 CEO는 그러나 "직급은 사람의 능력에 불필요한 한계를 지우거나 불가피하게 권위나 통제를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직원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선 직급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켈리 CEO가 2005년 CEO직에 오를 때도 직원들의 투표로 선출됐다.
관리자와 보스가 없는 대신 고어엔 '스폰서'라는 멘토 제도가 있다. 고어 직원들은 신입사원 때부터 스폰서가 따라 붙고,조직 활동의 모든 부분에 걸쳐 조언을 받는다.
◆직원들을 '제너럴리스트'로 키운다
고어는 재무 영업 개발 구매 등의 업무영역을 팀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대부분 프로젝트 위주로 업무가 진행된다.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직원들은 또 다른 분야로 옮겨간다. 개발 분야에 종사하다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는 경우나 그 반대도 수두룩하다. 직원들의 사업부 간 이동도 활발하다. 현재 고어의 주력 사업은 크게 섬유 의료 전자 산업재 등 4개 분야로 구분된다. 각 분야에 필요한 전문지식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어는 직원들이 사업부 간에도 업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이 같은 방식은 전문가 육성을 강조하는 일반 경영학의 통념을 뒤집는다. 대부분의 기업들도 '제너럴리스트(두루 폭넓게 아는 인력)'보다는 '스페셜리스트(한 분야의 전문가)'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켈리 CEO는 "지나친 업무 분리는 전문성에 함몰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최고의 혁신은 다른 관점과 독특한 시각에서 나온다"며 "해당 분야에 전문지식이 없는 경우에 오히려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고어텍스 브랜드를 널리 알린 '인사이드 마케팅'이 대표적인 사례다. 부품 · 소재 기업들이 최종 소비자에게 자사 브랜드를 알리는 인사이드 마케팅은 반도체 제조업체 인텔이 1990년대 초 가장 먼저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어는 이미 1980년대부터 고어텍스를 의류업체에 공급할 때 '고어텍스 로고를 반드시 옷 겉면에 붙여야 한다'는 계약을 하면서 인사이드 마케팅을 도입했다. 옷 소재인 고어텍스가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비결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고어의 마케팅 전문가들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비(非)마케팅 인력들이 이 아이디어를 냈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