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0년이나 됐다. 셋방을 전전하느라 작업실도 없던 시절.우여곡절 끝에 철거민한테 와우아파트를 샀다. 벽에 흰 칠을 하며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아파트가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허망하기 이를데 없었다. 할 수 없이 신촌로터리에 있는 창천아파트로 이사갔다. 복도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닭장식 집이 늘어선 9평짜리 시민아파트였다. 날마다 연탄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이 연탄가스에 취해 비틀거렸다.

"돈을 한푼이라도 모아 그곳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어요. 그런데 제가 첫 전시회를 일본에서 열겠다고 했죠.집사람은 '애들이 이러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 계속 살 거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둑기사 조치훈 얘기를 했지요. '난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 ' 조치훈처럼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온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작품을 하고 있었어요. 1972년 일본 도쿄의 깅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그런 아픔과 벼랑끝 상황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올해 77세.1960년대 후반부터 전위적인 미술집단 아방가르드협회를 이끌며 한국 추상미술의 지평을 열어온 하종현 화백.그는 "그때의 고생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며 "지금도 젊은 시절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실험하고 최근엔 화풍까지 확 바꿨다"고 말했다.

3년 전 경기 일산 가좌동으로 이사하면서 그는 집 옆에 가건물 4채를 지었다. 셋방살이 하며 끌고 다니던 작품들에 집을 마련해준 것이다. 폭설에 뒤덮인 건물들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첫 번째 가건물은 작업실.200호부터 1000호까지 대형 작품들이 마지막 붓질을 기다리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화풍이 확 바뀌었다. 그 전에는 물감을 올 굵은 마대 뒤에서 밀어내고 오돌토돌한 질감을 누르거나 변형시킨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번엔 좁고 긴 막대나 거울 사이에 물감을 넣고 옆으로 압착해 새로운 느낌을 살려냈다.

"35년간 해온 단색화를 이번에 다 버렸습니다. 손 씻고 그림 관리나 할 나이지만 요즘 100세까지 산다는데 여기서 그만둘 수 있나요. 그래서 작년에 작품을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나중에 더 고민해서 테마를 재미있게 만들 거예요. 이건희 삼성 회장이 '마누라와 가족 빼고 다 바꿔라'고 했을 때 나랑 같은 생각이네라고 했는데 기업이 그런 정신으로 상품을 개발하듯이 저는 새로운 예술로 승부하기로 한 거죠."

그는 대한민국에서 물감을 가장 많이 쓰는 화가다. 평면에 채색하는 게 아니라 물감 원액을 그대로 소진하기 때문이다. 작품 수장고로 쓰는 두 번째 건물에서 1960년대 후반 작품인 '탄생'을 만났다. "3년간 공을 들인 작품이죠.화면이 오돌토돌한데 서양에는 이런 작품이 없어요. 시커먼 작품만 나올 시기에 내놓은 화려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새 작품을 탄생시킨다는 획기적인 의미를 갖고 있죠.이 작품 이후 또 방향을 틀었거든요. "

거대한 화폭에 철조망을 박아 넣은 작품도 눈에 띈다. 그 속에는 1974년과 1980년대,1990년대,2000년대 작품들이 박혀 있다. 다시 과거로 가지 않겠다는 의미로 못까지 박아 놓았다. "작년에 일단락지은 작품입니다. 기하학과 설치미술 등을 적용했지요. 이 철조망은 혁명기를 나타낸 것입니다. 프랑스 르몽드 기자가 '혁명 한복판에서 작가의 마음고생이 보인다. 철조망은 인간을 억압하는 상징이다. 움직일수록 손해보는 세상을 예술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평가하더군요. "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마대를 못을 박아 가둔 작품 앞에서 "못을 박는 아픔을 느껴야 이런 과감한 작업을 할 수 있다"며 "내가 죽으면 대표작으로 남기려고 근래에 만든 작품인데 팔 생각은 없다"고 했다.

세 번째 수장고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는 "이건희 회장이 '10년은 먹고 살 것을 만들자'고 했듯이 화가는 10년 후 100년 후까지 빛날 명품을 만들고 그것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했다. 밝고 다양한 색의 물감이 흘러내리는 듯한 1000호 크기 작품을 설명할 때는 "예술은 더 높은 경지로 갈수록 자연스러워진다"고 했다. 먹물을 활용해 동양정서를 담아낸 미발표작 앞에서는 "시대의 비위를 맞추면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가건물에 보관한 그의 그림은 500점이 넘었다.

"이곳에 자리잡기 전에는 지하에 습기 차고 창문에 비가 들이쳐서 작품을 많이 버렸죠.이만큼 보존해온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하지만 돈이 모자라 아직 습도조절 시설 같은 것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안타까워요. 그래도 그림은 계속 그려야지요. 사과나무 심는 사람이 꼭 자기가 사과를 먹으려고 심나요?"

응접실로 들어서니 그의 초기 작품과 프랑스 화가가 선물한 작품이 걸려 있다. 프랑스와 국내에서 훈장을 받을 때 찍은 사진도 보인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청년처럼 활기 넘치는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9남매 중 제가 다섯 번째예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갔죠.아버지가 그곳에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마흔살에 혼자가 됐어요. 1945년 광복을 맞아 10월에 배를 구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식구들뿐만 아니라 징용갔던 사람들까지 150여명이 한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오는 길에 난파됐어요. 많은 사람이 죽었죠.할머니와 여동생도 그때 잃었어요. 한국에 거지가 돼서 온 거죠.똑똑하면 살아남고 아니면 교도소나 가는 상황이었는데 강인했던 어머니가 저를 다독여 나쁜 길로 안 빠졌지요. "

어머니는 사범학교를 가라고 했다. 교사 자격증이 있으면 먹고 살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엔 너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형제들은 모두 진주사범학교를 나왔다. 당시의 교사들은 주경야독해서 고시에 합격하거나 다른 길을 갔다. 그는 홍익대 미대를 택했고 화가가 됐다.

"지금 한국은 성장하는 국가지만 과거에는 서울로 오는 직항편도 별로 없었어요. 외국 사람들이 도쿄만 가고 서울은 어쩌다 잠깐 들르는 도시였죠.아무도 한국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새로운 예술을 하자는 의미로 모인 것이 아방가르드협회였는데 지금 유명한 작가들이 다 모였어요. 조각가 신문섭이나 김구림 등이 당시 멤버이고 민중미술의 대표 격인 신학철도 있었군요. 이들은 당대에 모두 성공했죠.아방가르드협회가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그는 주로 신문지 등 입체적인 것으로 작업했다. 통에다 로프를 넣는 등의 실험도 했다. 그러다 입체에서 평면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런데 단순히 평면으로 오는 것은 무의미해서 색다른 작업을 했다. 마대 뒤에서 물감을 밀어내는 작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재료를 개성있게 살리면서 그 위에 행위를 얹어 작품을 만들고 마대와 올의 특성을 최대한 살렸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것이 일반적인 회화라면 그는 이를 근원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새로운 기법을 발견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뒤에서 짜내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 발견한 것이지 어떤 영감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갈수록 성숙한 예술로 성장했죠.제 작품은 서양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공간을 해석하는 것이었어요. 지금도 그래요. 과거의 성취를 과감히 부수고 혼자 헤쳐나오는 중이지요. 최고의 경지에서 이전 작품을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게 가장 중요한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

이전 재료를 다 버리고 새로 만드는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안 해도 될 텐데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려면 개발비가 수조원씩 들지 않나. 그만큼 돈을 안 쓰고 어떻게 새로운 역사를 만들겠나. 예술은 상품보다 더 공력이 많이 드는 거다. "

그는 "젊은이들을 지금처럼 나약하고 돈맛에 휘둘리며 주저앉도록 키우면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예술가의 세계에선 더 그렇죠.저 같은 나이에도 새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데,젊은이들이 더 분발해야 합니다. 아파트 평수를 늘리거나 집을 치장하는 데 정력을 낭비하지 말고 진정한 예술에 인생을 걸어야 해요. 우리는 누구나 역사를 만드는 주인공이니까요. "

난 사람=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