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10년 '뉴 노멀시대'] IT코리아 앞세워도 융합기술 수준 선진국 절반도 안돼
대(大)융합시대가 밀려오면서 주요국 정부는 발 빠른 대응에 나섰다. 정부가 융합의 진흥자,조정자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던져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도 고유한 질문 두 가지가 있다. 융합투자가 과연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수준까지 촉발될 수 있을 것인가?(시장 실패) 융합에 걸림돌이 되는 법과 제도적 장벽이 충분히,빠르게 혁파될 수 있을 것인가?(시스템 실패) 선진국은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 빠른 선진국의 융합 대응

미국 유럽연합(EU) 일본의 융합전략은 상호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이 선두주자로 나섰다. 21세기에 들어서자마자 2001년 신(新) 과학기술정책인 '국가나노기술전략'을 내놨다. 2002년 '인간수행능력 향상을 위한 융합기술전략(NBIC)'은 전 세계 국가융합전략의 모델로 불린다. 나노,바이오(bio),정보(info),인지(cogno)의 4개 축이 초기단계에서부터 수렴 · 융합돼 연구되고 응용돼야 한다는 이른바 'NBIC 융합기술'의 틀이 제시됐다.

EU는 이에 뒤질세라 곧바로 2004년 '지식사회 건설을 위한 융합기술 발전전략(CTEKS)'을 마련했다. 미국의 NBIC에 환경과학,사회과학,인문학까지 포함시켰다. 미국과 EU의 움직임을 간파한 일본은 2004년 융합기술을 바탕으로 한 '신산업창조전략'을 발표하고,2006년부터 시작된 제3기 과학기술기본계획에서 융합기술 분야에 대한 중점적인 투자를 선언하고 나섰다.


◆산업융합 시대,한국의 현주소는?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융합 대응은 한발 늦었다. 그동안 융합에 대한 개별 부처의 산발적인 노력은 있었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본격적인 전략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2006년 4월이었다. 당시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에서 융합기술 종합발전계획 수립방안을 논의한 끝에 범 부처 5개년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2년7개월이 지난 2008년 11월 국가 융합기술발전 기본계획(2009~2013)이 나왔다. 작년 9월에는 이 계획의 후속조치로 국가융합기술지도가 발표됐다. 이런 작업들은 교육과학기술부 주도로 이뤄졌다.

2010년에 들어서면서 스마트폰발 충격이 가시화되자 지식경제부도 산업융합촉진법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국가적 융합전략으로 치면 미국에 비해 최소한 10년은 늦게 시동이 걸린 셈이다.

국가 융합기술발전 기본계획이 수립될 당시 한국의 융합기술은 전반적으로 초기단계로 선진국 대비 50~8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산업연구원(KIET)은 최근 보다 충격적인 조사 결과를 내놨다. 선진국의 융합선도기업을 5로 해서 한국의 해당 산업 주도기업의 기술,제품,산업 간 융합의 진전도를 해당 산업전문가가 평가한 것에 따르면 2010년 국내 주력산업의 평균 융합진전도는 2.30으로 나타났다. 국내 주력산업의 산업융합 진전도가 선진국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는 얘기다.

한국이 강점을 갖고 있다는 정보기술(IT)이 주력산업에 광범위하게 융합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도 이 정도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한국이 지난해 세계 7위 수출국으로 부상했다고 하지만 해당 산업별 총 수출 중에서 융합제품의 수출비중을 추정한 결과를 보면 향후 수출 전망이 밝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융합진전도가 비교적 높은 디스플레이 반도체 등의 경우 융합수출 비중이 40~50%에 이르지만 디지털TV 휴대폰 기계 등은 20% 안팎 그리고 자동차는 전기차 등 이른바 그린카를 대표적 융합제품이라고 할 경우 수출이 전무(全無)하다시피 한 실정이다.

◆기득권 버려야 산다

도대체 무엇이 한국의 융합 대응속도를 떨어뜨리는 것인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현재 한국 정부의 융합투자는 전체 연구개발 예산 가운데 많이 잡아도 10% 수준에 불과하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재의 정부 연구개발 지원 시스템으로는 융합이 우선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칸막이식 연구개발 지원구조에 집착하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그만큼 거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른 한 가지는 산업융합을 뒷받침할 법과 제도가 제대로 정비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국내의 한 전자회사는 혈당측정 · 투약관리 등이 가능한 당뇨폰을 개발했지만 의료법상 의료기기로 분류되는 바람에 각종 인 · 허가 부담으로 사실상 사업을 포기한 사례도 있었다. 한 중소기업은 트럭과 지게차를 결합,트럭지게차를 만들었지만 트럭인지 지게차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소관 부처의 제품 승인이 지연돼 수십억원의 손해를 본 일도 발생했다.

이런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다하다. 기업들이 기존의 개별업종 중심 산업발전법이나 각종 산업혁신촉진법,전통적인 시장 구분과 융합에 대한 기술규격과 인증제도의 미비 등 융합을 저해하는 법적,제도적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안현실 논설 · 전문위원/경영과학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