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현대그룹의 핵심계열사인 현대상선이 실시한 주주배정 유상증자에 범(汎) 현대가가 불참을 선언, 당분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으로 여겨진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 우려가 또 다시 시장에 번지고 있다.

독일의 쉰들러 도이치랜드(Schindler Deutschland GmbH)가 현대상선의 대주주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엘리베이터 역시 내달말 대규모 유상증자를 앞두고 있어 쉰들러의 증자참여 여부 또한 최대 관심사다.

◆현대엘리 장중 12% 뛰어…경영권 분쟁 '신호탄' 터지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쉰들러의 지분 매입을 두고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 현대엘리는 외국자본에 의한 엘리베이터산업의 잠식을 우려하고 있다.

27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에 따르면 쉰들러는 지난 10일부터 23일까지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식 13만3094주(1.87%)를 장내에서 매수해 보유지분을 종전 33.40%에서 35.27%로 늘려놨다. 쉰들러는 지난달말 한국프랜지공업의 지분 약 2.7%(19만여주)를 1주당 8만2000원에 매수, 지분을 본격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현대엘리베이터 주가는 이날 장초반 12%까지 치솟는 등 급등세를 연출하고 있다.

현대엘리의 지분구조상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를 적대적 인수ㆍ합병(M&A)을 할 수 없다. 현대그룹측 보유지분이 절반을 웃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쉰들러의 공격적인 지분매입 배경에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M&A를 전면에 나서 반대해오던 민경윤 현대증권 노동조합위원장은 이와 관련,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의 신호탄'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현대그룹은 경영권 안정을 위해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매년 갚아야할 돈도 산더미처럼 많아 쉰들러의 지분매입은 중·장기적으로 현대그룹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그룹, 증자로 '빚' 갚아야…쉰들러도 돈 내어줄까?

현대그룹은 실제 그룹내 주요 계열사들의 경영부실을 원인으로 지난 5월 외환은행 등 채권단에 의해 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을 요구받기도 했다. 현대그룹은 이에 불응해 지난 7월 채권단으로부터 신규대출 중단과 대출 만기연장 중단 조치까지 시행됐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최근 현대상선의 주주배정 유상증자에 참여, 약 580억원을 지원했다. 현대상선은 증자자금을 대부분 차입급 상환에 쓸 계획이다. 현대상선은 내년 1월~4월까지 막아야할 공모사채 및 선박·기기 리스료 등에 3200억원 가량을 쏟아 붓기로 했다.

현대엘리베이터가 대주주의 빚 중 일부를 갚아준 뒤 곧바로 자체 증자에 나서고 있는 모양세다. 현대엘리도 내년 5월까지 우선 사모사채(17, 18회) 500억원과 대출금 80억원을 상환해야 한다. 여기에 내년 2~5월 중 구매금융만기결제(약 1100억원), 설치와 주비(약 200억원), 현대건설 인수비용(약 1000억원) 등에 나머지 증자자금을 사용할 예정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에서도 이 때문에 쉰들러의 지분매입이 단순투자가 아닌 직접적인 경영참여 의지가 강하다는데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쉰들러가 현대그룹의 소위 '빚 잔치'에 돈을 주면서까지 지분매입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쉰들러는 현대엘리의 신주를 배정받을 수 있는 지난 24일까지 지분을 확대, 현대엘리의 주주배정 증자에도 참여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여기에 쉰들러와 현대엘리 모두 국내 엘리베이터 산업에 큰 관심과 우려를 동시에 내비치고 있어 이 분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쉰들러 "한국 엘리베이터 관심 많다"VS현대엘리 "외국계가 지분 상당 소유" 경계

쉰들러는 지난주 지분변동신고서에서 지분 보유목적을 매번 구체적으로 기재해왔다.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는 관련산업 부문의 선도기업이며, 한국의 엘리베이터 및 에스컬레이터 시장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며 "이에 따라 현대엘리와 제휴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경영진과 긴밀하게 협의해 사업을 진행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현대그룹도 쉰들러의 지분매입에 대한 우려를 직접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현대엘리가 금감원에 제출한 증권신고서(12월23일 최종 정정)에서 회사 측은 "국내 승강기 산업이 위기를 겪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지나치게 내수에만 의존해온 결과"라며 "또 승강기 산업전반에 대한 내성이 떨어지고 있는데다 건설 경기침체, 중국산 중저가 제품경쟁 등으로 산업내 영업환경도 좋지 못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엘리는 특히 "IMF 이후 입지를 굳힌 세계적 다국적 기업들인 오티스, 티센크루프, 코네, 미쓰비시, 쉰들러 등이 연 2조원 규모의 국내 승강기 시장의 5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며 "당사 또한 국내 토종기업이라고는 하지만, 지분의 상당수를 쉰들러 등 동종 외국계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강조해 쉰들러의 지분매입을 적잖게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쉰들러가 겨냥한 시나리오는 뭘까?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주주다. 그 누구보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란 게 M&A관련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따라서 쉰들러의 공격적 지분매입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여러가지다.

우선 쉰들러가 내년 3월 정기주주총회를 겨냥해 지분매입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현대엘리 최고경영진들의 임기만료가 임박한 시점에서 지분매입이 활발하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사내이사 두 명(현정은 대표이사 회장, 송진철 대표이사 사장) 중 송 대표의 임기가 내년 3월까지이며, 현재 이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등기임원 6명 중 4명(사내이사, 사외이사)의 임기가 2011년 3월 만료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쉰들러가 주주명부 폐쇄일을 앞두고 지분을 최대한 끌어모은 뒤 이사회에서 경영진 자리를 요구해 경영에 직접 참여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는 게 이 시나리오의 분석이다.

이사회 구성에 직접 관여하기 보다는 먼저 경영압박을 시도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전에 적극 나서며 지배구조가 예전보다 취약해진 틈을 타 지분을 매입했다는 것. 이는 쉰들러가 국내 엘리베이터사업에서 외국계 회사들끼리 공정하게 경쟁을 벌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실적을 올리기 위해 현대엘리의 지분을 대거 늘렸다는 설명이 뒤따르고 있다.

한경닷컴 정현영 기자 j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