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재정위기 단기 대응의 주역을 맞고 있는 가운데 유럽연합(EU)은 장기 처방으로 구제금융 메커니즘을 상설화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재정난에 처한 변방 국가 국채를 ECB가 매입하는 지금과 같은 대응책으론 위기 해결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EU 27개국 정상들은 1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정상회의를 열고,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 내 재정위기 국가에 대한 구제금융 메커니즘을 상설화할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리스본조약을 일부 개정키로 합의했다.
헤르만 반롬푀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각국 정상들이 구제금융의 상설화를 가로막는 리스본조약의 관련 조문을 '제한적'으로 개정키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EU 정상들이 유로존 재정위기에 대응할 상설 메커니즘인 유로안정화기구(ESM)를 출범시키려면 리스본조약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독일과 프랑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반롬푀이 상임의장은 "이번 리스본조약 개정은 개별 회원국의 주권을 공동체에 넘기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간소화한 절차'에 의해 개정안이 승인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스본조약에는 '유로화를 사용하는 회원국들은 유로존 전체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재정)안정 메커니즘을 구축할 수 있다. 이 메커니즘에 따라 제공되는 금융 지원은 엄격한 조건에 따라 실시된다'는 두 문장이 추가된다. 리스본조약이 개정되면 2013년 5월 7500억유로 규모의 유로존재정안정기금(EFSF)이 만료된 이후에도 ESM이 EFSF의 역할을 넘겨받아 재정위기를 겪는 회원국에 대한 구제금융을 담당하게 된다.

올 들어 그리스와 아일랜드에 지원된 구제금융과 재정안정기금은 'ECB와 유럽 내 중앙은행들이 개별 국가의 재정적자를 직접 보조해주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리스본조약의 제약을 피해 '한시적 · 편법적'으로 시행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은 EU 정상회의에서 구제금융 메커니즘 상설화를 결정한 데 대해 "그동안 EFSF를 확충하거나 유로존 공동 국채를 발행하자는 등의 제안에 독일이 반대해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하는 동안 재정위기가 악화돼 올해 유럽 국가들의 부채 규모가 2조달러에 이르게 됐다"며 "자칫하다 유로화 체제 자체가 붕괴되는 파국을 맞을 수 있어 유로존이 봉합에 나섰다"고 분석했다.

한편 독일 경제 일간 한델스블라트는 "재정위기 전염 우려가 높아진 스페인이 최근 10년물과 15년물 국채를 각각 연 5.44%와 5.95%의 고금리에도 불구하고 발행에 성공해 당장 올해 필요한 자금은 확보한 만큼 연내 EFSF에서 추가로 구제금융이 나갈 일은 없을 듯하다"고 내다봤다. 영국 BBC는 "큰 틀에서 대책을 마련하긴 했지만 지금부터 2013년 사이에 변방국 국채를 매입하는 투자자들이 향후 발생할 손실을 분담할지와 변방국 부채의 자산재평가를 실시할지 여부 등 민감한 핵심문제에 대해선 여전히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은근슬쩍 넘어갔다"고 꼬집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 리스본조약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부결시킨 유럽연합(EU) 헌법의 대안으로 EU가 마련했다. 내부 통합을 다져 정치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일종의 '미니 헌법'이다. EU 27개 회원국 정상들이 2007년 10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최종 합의했고 지난해 12월1일 공식 발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