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이 현대건설 핵심 계열사인 현대엔지니어링 경영권을 담보로 전략적투자자(SI)를 유치하려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에서 신용만으로 대출받았다는 1조2000억원의 검증을 놓고 현대그룹과 채권단 간에 벌어지고 있는 논란이 새 국면을 맞고 있다.

6일 금융권에 따르면 현대그룹은 8월31일 오스트리아 스툼프그룹과 계약내용협의서(term sheet)를 교환하면서 1조원을 투자받는 대신 현대엔지니어링의 경영권을 넘기기로 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은 현대건설이 지분 72.55%를 갖고 있다. 현대그룹은 지금까지 줄곧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현대건설 및 계열사의 자산을 담보로 활용한 적이 없다"고 설명해왔다.

스툼프그룹과의 계약내용협의서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인수하려는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돈을 조달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은 그동안 현대건설 및 계열사를 담보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요 인수 정당성으로 내세워왔다. 비록 현실화되진 않았더라도 현대그룹의 도덕성에 흠집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게 시장의 반응이다.

현대건설 채권단 관계자는 "(현대엔지니어링 경영권 매각은) 실행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판단할지는 법률적인 검토를 거쳐야 한다"면서도 "담보 사실이 발각되면 허위 사실 보고에 해당돼 양해각서(MOU) 해지 사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스툼프그룹의 자회사인 M+W가 현대엔지니어링 인수를 강력히 희망했으나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판단돼 이를 거절했고 그 결과 지난달 11일 M+W와의 협상이 결렬됐다"며 "현대건설 인수 이후에도 현대엔지니어링 매각 계획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전략적투자자 유치 과정에서 담보 제공을 약속했다는 점은 논란이 되고 있는 나티시스은행 대출금의 실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현대그룹은 스툼프그룹 유치에 실패한 후 프랑스 선박금융 전문은행인 나티시스은행을 재무투자자로 끌어들였다. 총자산 33억원의 현대상선 프랑스법인이 나티시스은행으로부터 1조2000억원을 신용만으로 빌렸다는 게 현대그룹의 주장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나티시스 같은 유럽 선박금융 회사들 대부분이 정부 지원을 받는 등 위기에 빠져 있다"며 "선박을 담보로 잡혀도 총가치의 60%가량만 대출해주는 상황인데 단순히 신용만으로 대출해줬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현대그룹이 대출계약서 제출을 거부하면서 '1조2000억원' 실체를 둘러싼 각종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일각에선 현대건설이나 현대그룹 계열사가 아닌 제3자의 자산을 담보로 잡혔을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증권가에선 현대그룹 일가의 자산을 담보로 맡겼거나 혹은 현대엘리베이터 등 현대그룹 계열사의 경영권이 자금 대출 조건이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대그룹이 지난 3일 채권단에 제출한 대출확인서와 관련한 의문도 쏟아지고 있다. 대출확인서에 직함 없이 이름만 있는 데다,그나마 나티시스은행의 손자회사인 넥스젠캐피탈 임원이 서명한 것으로 확인되면서다. 나티시스은행이 아닌 넥스젠캐피탈 등 다른 곳에서 1조2000억원을 대출받았을 것이란 의문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채권단은 7일까지 대출계약서를 제출하라고 현대그룹에 요구해놓은 상태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